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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어릴 때에 다리에 대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나 또한 자라면서 다리에 대한 많은 추억이 있다.
우리 동네의 이름이 물과 관련해서 불리게 되었으니 다리는 필연이다. 물이 있어야 놓이는 것이 다리다. 그러니 우리 동네가 다리와 많은 연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물로서 성을 쌓았으니 ‘염성(濂城)’은 다리가 없을 수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
염성의 염자, '내이름 염(큰 내가 자자지고 다시 흐르는 도랑 염자)'의 한자말을 택한 것이 우리 동네의 특질을 잘 나타내는 것인데, 보통의 동네는 산을 뒤로하여 앞이 들이나 산으로 둘러있게 돼 있는 곳과는 다르게 우리 동네 뒤에는 줄기 산이 있긴 하되 그 산이 물 한가운데로 뻗어 있는 형국이다.
산이 개울을 한참 밀어서 개울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돼있어서, 물이 이 산 때문에 비껴서 바다로 흐르는 형국이 돼버렸다.
물길을 가로막은 산을 배경으로 동네가 있으니 이 물이 또한 늘 동네를 위협하고 때로는 보호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 동네는 예부터 행정구역으로 군의 경계로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며 천혜의 자연성의 구실을 한, 바다와 큰물과 큰 산줄기를 이어서 등지고 앞가리고 있다. 즉 뒤는 산이요 왼쪽은 개울이고 동네 앞은 넓은 들이지만 오른 쪽은 바다로 이은 산줄기요 멀리 앞은 바다이니 동네를 두고 사방이 산과 물로 둘러 싸여 있는 지형이다. 그러니 우리 마을은 기막힌 요새인데 조금 좁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 된다.
태반의 밭이 우리 동네의 큰 개울을 건너서 있다. 논밭은 큰 개울과 적은 개울사이에 '삼각주(뎉타형)'로 펼쳐진 들판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 건너든지 이 개울을 건너다니게 마련이다. 멀리 돌아서 다니지 않으려면 꼭 건너야하는 다리가 하나 있는데 그 다리가 돌다리다. 돌다리를 면하지 못하는 것은 제방을 넘어서 이 돌다리를 건너야 들판으로 질러가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또 이 제방을 달구지는 넘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람과 그에 딸린 마소들만 건너게 된다.
해마다 장마 때 '큰물'이 다리를 떠가기에 새로 놓아야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돌다리를 또한 면 할 수 없다.
이 돌다리는 우리 동네 사람들의 발자국을 하루에 두 번 이상을 들으니 일 년에 몇 번을 건너는지를 자세하게 알고 있을 것이고 우리 동네의 부지런한 이와 게으른 이를 다 알고 있을 돌다리이다. 이 돌다리쯤에서는 하루의 피로를 풀게 하는 목마를 칠 수 있고 후미진 곳에서 목욕도 할 수 있는, 쉬어 가는 자리이다. 이 돌다리에 오기 전까지 배불리 벅은 소들이 물을 먹어서 주인을 기쁘게 하고 주인은 그 동안에 등짐을 벗고 쉬며 땀을 식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우리네 돌다리가 ‘두드려보고 건널’ 필요가 없는 완벽한 다리인 것은 우리 동네의 인심을 말해주고, 우리 동네 사람들만이 다니는 한 길이며 양심이 놓여있는 다리이기 때문이다. 어딜 가도 이렇게 길고 이렇게 잘 놓여 진 돌다리는 볼 수 없는, 우리 동네의 자랑이기도 하다. 돌다리가 자랑거리로 될 수 있는 것은 우리 마을이 물로 싸여 있기 때문에 다른 마을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별한 자연환경이 부른 명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돌다리는 우리네 삶의 장이요 우리네 삶의 증거요 우리네 삶의 오늘이요 내일이다.
이 다리를 건널 수 없음은 논밭일 도 할 수 없는 일기를 말해왔고 이 돌다리의 물 잠김을 눈 여겨서 기우제도 지내야 했다.
물안개 피는 먼 곳의
신작로 나무다리 위
피란 개미 이어 가듯
소달구지들 지나가고
청솔 안은 언덕아래
철다리 위 기어가는
어미 쫓는 땅강아지
저녁 기차 내려가네.
은어 떼 꼬리친 여울
바닥 붙 박은 돌다리
목에 차고 키 넘어도
내일 같이 도와 주네.
이 돌다리가 잠기면 동네 위쪽 가장에 놓인 신작로 길을 잇는 나무다리를 이용 한다. 다른 볼일이 있거나 외지로 빠지는 때는 이 넓은 길을 이용하게 되는데, 우마차를 이용하는 농사일 또한 이곳을 이용해야한다.
나무로 다리의 발을 세우고 그 위에 보를 질러서 솔 가치들을 더미로 올려놓고 그 위에 자갈을 까는 원시적인 다리인데 몇 년에 한 번씩 나는 큰물에 떠내려가기 십상이다. 그럴 때면 동네서 바깥볼일은 아예 체념하고 물이 빠질 때까지 며칠씩 기다렸다가 개울바닥을 더듬어서 다닌다. 사람도 소달구지도 예외 없이 이런 신세가 된다.
물은 무섭다. 할머니 말씀 중에 ‘불난 자국은 있어도 물간 자국은 없다’ 는 이야기는 자주 겪은 우리 동네 분들만의 산 교훈으로 자리하고 있다. 대홍수는 모든 것을 쓸어가고 돌만 남기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다.
돌다리는 물론 잠기고, 나무다리가 떠내려가면 하는 수없이 급한 볼일은 '철다리'(철교:기찻길)를 건너서 이웃마을로, 읍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보는 일도 노는 것도 젊은이 순서대로 이루게 마련인데, 철길을 건너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한 짓이기 때문에 어른들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비상시엔 하는 수 없이 이 철다리를 건너는데, 기차가 지나가는 시간을 피해서 가는데도 이따금 여객 열차 이외의 차, 정거장기차시간표에도 없는 차가 지나갈 때가 있어서 식구들은 건너는 이가 다 건널 때까지 마음을 조인다.
정말 기차가 올 때는 부득불 철길을 붙들고 몸을 밑으로 드리워서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 간다. 이런 다리 건네기는 피차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급한 사항이 아니고는 잘 행해지지 않는다. 외부에서 들어올 때도 마찬가질 터인즉, 이를 일러서 물로 된 성채 ‘염성’이라 이름 아니 지을 수이었겠는가 싶다.
우리 동네의 명물인 또 하나의 다리는 정거장으로부터 질러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봇도랑 위에 놓인 외나무다리이다. 이 다리는 우리 동네 모든 이가 기차를 이용할 때에 드나드는 지름길이기 때문에 기차를 타고 오는 손님의 인사가 이 외나무다리 곁에 있는 빨래터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외지손님의 동네 '입성(?)'은 곧바로 알려지게 되고, 그 정보는 마을전체로 즉시 퍼져서 공유되고 이여서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노한다. 그러니 이번에는 이 봇도랑조차 물의 성을 만들고 있는 형국이 되고 있다. 그래서 또 ‘염성’이다.
이 외나무다리는 정거장 개찰구 다음에 있는 '동네 개찰구'이다. 우리 고모가 이 다리를 건너 오셨고 우리 고종사촌누나 '정남'이가 이 다리를 건너서 떠났고 나 또한 이 외나무다리를 건너서 학교엘 다녔다.
얼마나 변했는지는 몰라도 꿈속을 거니는 것 같은 외나무다리가 그 자리에 그냥 있어서, 기어이 한번 건너보고 싶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