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진

외통궤적 2008. 12. 7.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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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벌판 위에 급조된 건물이 늘어서 있는 좁은 골목길 위에 좌판을 놓고 그 위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물건을 잽싸게 흘겨보며 지나가는 지게꾼과 손수레꾼, 손님들 틈을 비집고 반백의 늙은이가 손가방을 놓칠세라 옆에 끼고 부지런히 걷는다. 부닥치는 어깨엔 아랑곳없이 오로지 앞만 보고 걸어간다. 가게 안에 들른 중늙은이는 주인아주머니와 잠시 무엇인가를 이야기로 나누더니 곧바로 가게 문을 열어젖히고 쏜살같이 빠져나가 한 무리 속을 뚫고 사라진다.

파노라마다!

한세월을 오직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고, 잇단 또 다른 세월은 처자식을 굶기지 않으려고 마냥 방황하다 어렵사리 인연 맺은 신용협동조합 창립 일원의 자리를 천직으로 여기고 곁눈질 없이 육십을 넘겨 칠십을 바라보는, 이날까지 한결같았을 친구를 상상하며 어둠을 가르는 울산행 버스 뒷자리를 얻어 탄 살아있는 친구의 마음은 아득히 흐르는 별들 속에 빨려든다. 상념의 터널에 빨려든다.

일상에 뒤처져 잠자든 옛날, 살아있는 친구의 초연한 모습, 지금은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화석, 야위고 힘없는 장력,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을 억누르는 양옆 턱 속의 어금니가 보였다.

죽음이란 생각조차 못 했을 젊은 시절, 살아있는 친구에게 들려주었든 편지 한 토막 구절에서 지금 살아 있는 친구는 죽은 친구의 기구한 극적 삶을 더듬어 본다.

꺼져버릴 자기 촛불, 바람막이 못 하고 꺼뜨렸을까. 살아있는 친구의 의식은 죽은 이의 영혼을 애타게 찾을 뿐, 산 자와 죽은 자의 영혼은 상통되지 않는다. 눈을 감는다.

산 친구는 이제 죽은 친구를 향해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더 살았으면 무엇을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산 친구는 저에게 되묻고 죽음과 삶의 다른 의미를 찾으려고, 죽은 이에서 산 자기를 발견하고 산 자기에게서 죽은 친구를 느끼는 묘한 동질의 핵을 음미한다.



영정을 대하는 산 친구의 가슴은 메고 치솟는 슬픔을 주체할 길 없어 상주와 대면도 하듯 말듯 영안실 마루턱에 걸터앉았다. 누가 보든 말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서. 흔들리는 어깨와 훔치는 손수건이 연달아 반복되는 순환의 울분이었다.

시간이 얼마를 지나, 다시 상주와 미망인을 차례로 만나 삶에서 죽음에 이르는 갈림길까지를 조심스럽게 알아본다. 산 친구의 눈에는 여전히 줄줄이 눈물이 흘러 말문을 잇지 못하는데, 상주와 미망인은 오히려 담담하게 가라앉아 자초지종을 자상하게 들려준다.

더는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고 어디 가서 실컷 울고 싶은, 사색엔 먹구름이 드리우고 숨결은 바람같이 불고 맥박은 노도같이 일렁인다. 살아있는 사람의 뼈도 죽은 사람의 뼈마디와 다를 바 없이 토막 뼈 이것만, 단지 탄력(彈力)으로 산 사람의 특권을 누려 훌쩍 나가 버리려다 일순, 번개가 친 후 비가 개듯, 이내 평정을 되찾는다.

다시 살아있는 친구로서 죽은 친구에 대하여, 어쩌면 가족이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영역에 대하여, 가족이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이제 말하려 한다.



‘내 말을 잘 듣고 실행하십시오’.

가는 친구의 고결한 뜻과 가느다란 삶을 담은 혼을 동질의 친구가 전하려 한다. 가족은 알 수 없는 것, 이제 친구를 대신하여 전한다.

‘죽은 친구의 한이 서려 있는 깨알같이 쓰여 있을 육필과 소품들을 하나같이 소중히 간직했다가 언젠가는 오게 될 그날, 고향의 죽은 친구 형님에게, 형님조차 돌아가셨다면 조카에게 전하시오’.

유족은 고개를 끄덕인다.



서울로 돌아오는 살아있는 친구의 눈은 온통 부어서, 무상의 인생을 차창에서 더듬는다.

친구는 어느 대학병원의 실험용으로 기증됐고, 어쩌면 지금 그 유해가 알뜰하게 보존되어 나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친구여! 남을 위하여 죽어서까지 모든 걸 바치는 그 뜻을 기리어 나는 이렇게 친구를 절규하노라./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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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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