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갯마루'는 언제나 정감이 넘치는 곳이다.
마루턱이 턱밑에 닿으면 숨을 몰아쉬면서 걸음을 재는데, 마음은 괜히 설렌다. 더구나 낯선 고장으로 갈 때는 더 설렌다. 빤히 보이는 들길보다 고개마루턱이 있는 길을 더 좋아했던 나다. 고개가 가까워지면 그 너머에 우리 옛집이라도 닮은 초가가 있을 것처럼 그립다. 어떻게 생긴 마을이 있을까? 그 마을엔 기와집이 몇 채나 있을까? 아예 없을까? 들은 넓을까? 개울은 어떻게 생겨서 어디로 흐를까? 끊임없는 호기심에 걸음을 잰다.
아직은 본 적이 없는 고개 너머에 펼쳐질 풍광이건만 내가 떠난 마을을 마냥 그대로, 보지 못한 고개 너머에 그려나간다. 그러다가 마루턱에 올라 내려다보는 새로운 산야에 내 마음의 고향 그림은 다가온 눈앞의 새로운 풍광 뒤에 숨어버린다.
가슴이 트인다. 그리고 그 정겨움은 이제까지 온 먼 길을 되돌아볼 겨를 없이 즐겁다. 눈 앞에 펼쳐진 그림 같은 마을을 내려 보는 그 맛, 살아 있는 모든 이의 즐거움을 한데 모아들여도 채울 수 없을 것이다.
고개마루턱에서 맞는 정서의 소용돌이는 언제나 내 눈앞에 벌어지던 형상(形狀)으로 새로이 확인되고 내 감성에 나만의 울을 쳤는데, 그런 지난 추억의 그림조차 사라지더니 이제는 감상(感想)의 울을 넘어 내 인생행로의 마루턱이 되어 다가왔다.
마루턱에서 내다보는 눈앞은 평화로운 마을이 아니라 황량한 벌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눈을 들어 만상을 빨아들여 녹이고, 거기서 평안을 찾던 그 감상의 그림은 이제는 멀리 있지도 않고 내게서 떨쳐낼 수도 없는 내가 되고 말았다. 내 인생의 고개마루턱이 코앞에 닥치고 그 너머에 내가 그 정경의 실체로 다가선다.
아름다운 산야가 황폐의 불모지로 되어 내 갈 길에 끝없이 펼쳐지고 초록빛의 관목들은 잎 털어버린 나목(裸木)이 되어 앙상히 기울어 하얀 뿌리 뼈를 드러내고 서 있다. 기와집은 한 채도 없고 서까래가 드러난 빈집만 마른 잡초를 이고 쓰러져 가고 있다.
하지만, 그곳에 물이 흘러 윤기 나는 숲을 이루고 시냇물에 고기가 노니는, 그곳에 내가 그렇게도 부러워했던 집, 꿈에 그리던 기와집을 마련하여야 하는데, 이렇듯 황량한 벌판 한 가운데 서 있다.
돌아갈 수 없는 길, 인생의 고개마루턱에서 바라보는 내 앞은 이때까지 그리던 형상적 고개마루턱과 다르게 다가오고, 아름답고 정겹던 고개마루턱의 체험을 흐리게 한다.
고개를 흔들어 젓는다. 그럴 수는 없다. 그것은 나를 부정하는 짓이다. 그리고 마루터기는 온전히 형상물의 이름이다. 추상적인 마루터기가 실존하는 마루터기를 어찌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 하지만, 하지만 내 고개마루턱에서의 생각은 이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할 자유로운 사색의 깊이마저 포기할 아무런 이유는 없다고 연신 소리 안 나는 목청을 뽑아낸다. 그러기에 더욱 서글프다.
형상의 고갯마루여! 인생의 고갯마루여, 그냥 머물러라! 이제 내려가서 그 황량한 들판에다 초가집 짓고 뒤란에 채송화, 봉선화, 맨드라미라도 심고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온 길 돌아갈 수 없지 않은가? 싫어도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말자. 그래서 기와집일랑 이승의 아름다움으로만 기억하자. 어찌하랴! 인생의 황혼길, 내려가리라. 그리고 허리춤 추스르고 발 모으리라! 돌아보니 먼 길을 왔다.
어느 양지바른 곳에 내 넋이 깃들 비목인들 세워질런가?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