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85.001205 건강 많은 이가 주어진 대로 살지 않고 포장하고 또 그 위에다가 덧칠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덧붙여서 살려고 한다. 그래도 안 되면 떼어내 버리고서 이번에는 다른 모양과 형태를 갖추어서 붙이고 칠한다. 이렇게 살다보니 본연의 나는 없어지고 내가 아닌, 나와는 거리가 먼, 그런 내가 돼서, 그런 나를 위해서, 딴에는 열심히 산다고들 한다. 뒤집어서 말하면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의식하며 살면서도 그 남이라는 이와는 상관이 없는, 정작 남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면서 스스로에 도취돼서 살아가다 보니 세월은 어느새 훌쩍 내 키를 넘어가고 있다. 이 세월을 내 몸에 감싸 안았다면, 세월은 정녕 나를 위해서 건강과 행복을 머물게 했을 것이다. 내게 주어진 것,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임엔 틀림없지만 그래도 굳이 생각해 본다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 삶이 아닌가 한다. 자연계의 질서대로 살자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자연을 정복함으로써 인간의 복지를 꿈꾸지만 만부당한 일임을 작금에 증명해 주고 있다. 우리들 인간이 사회적이긴 해도 다른 동물세계의 사회성과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것, 이것이 우리를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대목이다. 우리가 자연 생태계의 다른 동물들처럼 그들 나름의 질서를 얻는데 드는 시간과 정력을 극소화하지 않고, 그들 나름의 위계를 구축하고 행복해 하는, 그 방법을 우리 스스로 저버리고 각자가 능력 이상으로 상승하려고 시간과 정력을 쏟고 포장과 덧칠의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고통을 감내 하면서 허송하고 있다. 그렇다. 고통이 희열의 모태임은 자명하나 그 고통이 영속적이고 점증적이라면, 세월이 키를 넘고 나의 포장만 스칠 때 나의 행복은 이승에서는 찾을 수가 없지 않겠는가! 우리 인간은 갖가지의 복잡한 구조 속에서, 또는 그가 속한 공간적 권역 내에서 자기 위치를 찾아 가는데 너무 많은 세월과 정력을 소비하면서도 모자라서 여러 가지 포장과 칠을 하는가 하면 위장의 꽃가지 피우느라 고심한다. 여기서 우리의 최대 목표인 행복의 열쇠를 찾아 봐야 할 대목이다. 빨리 각자가 자기의 능력 범위 내에서 자기 위치를 찾자는 것이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자기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노동(운동)을 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러면 욕심이 없어지고 욕심이 없어지면 만족하게 되고 만족하면 행복한 것이다. 그러면 행복한데 무슨 건강이 필요한가 할 것이다. 인간 조건 중 하나가 노동(운동)이다. 이 조건을 충족시켜 주지 않는다면 그는 마치 탄도의 낙착포물선(落着 抛物線)같은, 추진력을 잃은 앞날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행복은 사라지고 애써서 욕심 없는 내 자리(위치)를 찾은 보람도 잃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의 추진력을 갖지 못하고 젊음의 발진(發進)에만 힘 빌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인간 조건을 충실하게 지킨다면 마치 학이 제 의지대로 날개의 힘이 다하는 곳까지 유유자적 날다가 스스로 앉을 자리를 마련하여 안착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의지대로 우리 힘이 다하도록 평안히 살다가 때가되면 고통 없이 안착할 것이다. 노동(운동) 없이 장수하려면 먼 훗날에 팔과 다리 손바닥 발바닥이 퇴화되고 머리칼이 없어지는, 그런 때라야 가능할 것이다. 왜냐 하면 손놀림 발놀림이 필요 없어도 살 수 있도록 지어(창조: 진화)저서 밖에 나갈 일이 없고, 따라서 햇볕을 쪼일 일이 없어질 때가 돼서야 머리칼이 없어지기 때문이리라. 아직은 자연(절대자)이 우리의 고도 산업 사회를 인정하지 않아서, 노동(운동)을 절대시하기 때문에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운동의 과학화가 우리 인간 조건인 노동 조건까지를 수렴 하면서 발전 시켜서 오늘을 있게 했다고 한다면 우리 인간의 미래에서 손과 발 팔과 다리는 더욱 필요한 생존 수단으로 될 것이고 이 인자를 유전시킴으로써 운동하지 않는 사람은 그 수명이 더욱 더 단축 될 것이다. 운동(노동) 하기 실은 사람은 이래저래 자기의 명을 재촉하는 것으로 보아도 될 만하다. 나는 우리가 운동(노동)을 얼마만치 했느냐를 따져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다만 사람의 나이는 두 개가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흔히 하는 얘기로, 기록(호적)상 나이와 기능상의 나이가 그것이다. 젊었을 때는 차이가 안 나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 차이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호적상 나이가 45살일 때 기능 나이와의 차는 39살부터 51살까지 12살로 벌어지고, 55살이면 48살부터 62살까지 14살 벌어지고, 65살이면 57살부터 73살까지 16살 벌어지고, 호적 나이가 75살이면 기능 나이는 66살부터 84살까지 무려 18살까지 벌어진다는 것이다. 75살 된 이가 66살처럼 정정하게 뵈는 이가 있는가 하면 84살로 쇠약해 뵈는 이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교도부립 의과대학의 야마다 명예교수가 제창한 것이다. 우리가 새겨서 맞추어 볼만한, 운동 양이나 질의 측정 방법이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지어다. 육체의 나이가 젊으면 정신적 나이도 따라서 덜 차는 것이니 정신적 나이를 먹으려면 굳이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요람에서 잠꼬대하는 소리가 아니라 무덤에서 울부짖는 소리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