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외통넋두리 2009. 1. 1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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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9557.040210 무대

 

누나의 무대는 턱없이 좁았다.

 

갓 해방된 나라, 강원도 변두리 바닷가의 시골 마을에도 인근의 항구도시에서 흘러온 신사조의 물결은 여지없이 파고들었다. 검정‘몸뻬’옷이 치마로 바뀌고 ‘지카다비’와 ‘게다’와‘게도루’가 고무신과 펄렁거리는 치마와 바지저고리로 변하는 가 싶더니 흩어져 나갔던 동네 청년들이 마을로 찾아들었다. 은둔하듯 살아오던 마을의 뭇 처녀들 또한 더불어 가슴을 폈다.

 

누나라고 거기서 빠질 수는 없었다. 더구나 내가 따를 수 없이 돋아난 누나는 시대를 잘못 만나, 가난이 더하여, 누나의 소질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다가 물을 만난 고기처럼 튀어 오르면서 행동은 어느새 ‘끼’를 엿볼 수 있을 만큼 자신에 차 있을 때다.

 

이때까지만 해도 마을 처녀들은 누구나 우물가가 아니면 새 소식을 얻을 수 없었던 한촌(閑村), 그저 시집가는 날까지 집안일을 도우면서 살아야 했었다. 외부의 소식을 듣는다는 것은 출입한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는 것이 고작이었던, 한 시절이 흘렀다.

 

그런 가운데, 일제의 ‘소학교’를 졸업한 누나의 진학은 우리 집 형편으론 엄두도 못 냈다. 우선 외지에 나가려면 그만한 경제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도 문제려니와 여자의 몸으로 홀로 외지에 나간다는 것은 어림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거둘만한 친인척의 누군가가 도시에 있어야 했는데, 우리 집엔 그런 인연이 없었기에 누나는 더구나 주저앉는 수밖에 없었다. 누나의 향학열은 높았다. 그래서 주어진 여건에서 만이라도 발휘해보려고 몸부림을 쳤을 테니 얼마나 목마른 지식의 갈증이었을까!  나는 짐작한다.

 

사상이 어떻고 이념이 어떻고, 하는 그런 것은 젖히고,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누나의 지적 갈증을 푸는데 보탬이 되었을 테니 지역에서 할 수 있는 무엇이든 서슴없이 참여하려 했다. 이렇게 신여성이 되려는 누나의 열망은 끊일 줄 몰랐다.

 

이 무렵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박박 깎았던 머리를 길렀고 면면촌촌이 놀이와 연극과 광대가 유행처럼 번졌다. 마을의 청년들은 때를 만난 듯 각자의 기량을 서로 그러내려는 무대를 마련했는데, 누나는 그런 곳에조차 나갈 수 없었다. 나가고 싶었지만 고루한 우리 집안에서 승낙하지 않았기 때문에, 몰래 노래를 배우곤 했다. 비록 신파 극단에는 따라나설 수는 없었지만 공식적인 마을의 모임이 있는 공회당에서는 곧잘 잠재된 재능을 발휘했다.

 

붉은 깃발을 든 노동당의 전위인 예술동맹에서조차 가입할 것을 권유받았고 이를 뿌리친 어른들의 고집으로 누나 또한 여기에서도 좌절했다.

 

지금, 이런 누나에게  나는 무대를 마련해 드리고 싶다. 비록 세월이 흘러서 혼백의 처지로써 밖에 설 수 없을지라도, 굳이 거기에서 누나의 못다 한 한을 풀어드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이렇듯, 어쩔 수 없는 사적(史的) 소용돌이에 휩쓸려 피지도 못하고 떠난 누나에게 영혼의 위로나마 드리고 싶다. 진정 타고난 소질을 계발하지 못한 누나의 삶은 아직 이승에 살아남은 내게 한을 맺게 했고, 이제  나는 그 한을 이렇게 밖에 풀어 드리지 못한다.

 

누나가 지금의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이 시대를 풍미했을 것이라고 추기고 싶다. 예술적 소양을 펴지 못한 누나의 원혼을 달랜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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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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