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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 전화(戰禍)

▲ 1950. 9. 30. 전화(戰禍)로 폐허가 된 대전역

▲ 1950. 11. 24. 불타버린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 1950. 10. 7. 불타고 있는 김포 비행장.

▲ 1950. 10. 18. 전화에 그을린 중앙청.

▲ 1950. 10. 18.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멀리 북악산과 중앙청 돔이 보인다

▲ 1950. 9. 20. 왜관, 낙동강 철교 복구 공사.

▲ 1950. 10. 12. 미조리호 군함에서 청진항을 향해 함포사격을 가하고 있다

▲ 1950. 10. 20. 400여 명의 낙하산 부대가 평양부근에 투하되고 있다.

▲ 1950. 12. 18. 북한군에게 뿌린 귀순 권유 전단.

▲ 1950. 11. 2. 적십자사에서 피난민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있다.

▲ 1950. 10. 13. 경기도 파주, 참혹하게 학살된 시신들.

▲ 1950. 11. 1. 서울 중앙청 앞 지금의 문화관광부 자리,

주민들이 폐허더미에서 땔감이나 돈이 될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

▲ 1950. 11. 2. 원산의 한 성당,

폐허가 된 성당 내부를 신도들이 청소하고 있다

▲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탈곡한 볏단을 달구지에 싣고 있다

▲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전란 중에도 추수를 하고 있다.

바람개비로 알곡을 가리는 농부들.

▲ 1950. 11. 19. 북한의 한 지하 무기 공장 내부.

▲ 1950. 11. 20. 국경지대,

미군들이 소달구지로 보급품을 운반하고 있다.

▲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비료공장.

▲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송전소.

▲ 1950. 11. 23. 함경도 갑산, 미군 폭격으로 성한 집이 드물다.

▲ 1950. 11. 1. 황해도 평산에 진격하는 유엔군을

두 여인이 전신주 뒤로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 1950. 12. 4. 평양을 떠나 대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국군.

▲ 1950. 12. 6. 황해도 사리원,

남행하는 피난열차에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 1950. 12. 8. 경기도 금촌,

38선을 넘어 후퇴하는 유엔군 차량들.

▲ 1950. 12. 9. 끊어진 한강철교.

▲ 1950. 12. 10. 포화에 불타는 마을.

▲ 1950. 12. 12. 한강 부교를 통하여 후퇴하는 차량들.

▲ 1950. 12. 12. 피난민들이 한강을 나룻배로 건너고 있다.

▲ 1950. 12. 12. 유엔군들이 인천항을 통해 장비들을 후송시키고 있다.

▲ 1950. 12. 12. 유엔군들이 후퇴하면서

다리를 폭파시키고자 폭약을 장치하고 있다.

▲ 1950. 12. 3. 평양, 남행 피난민 행렬 속의 한 소녀.

▲ 1950. 12. 10. 중공군의 참전으로 강추위 속에 후퇴 행렬.

한 병사가 너무 추운 날씨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다.

▲ 1950. 12. 12. 흥남부두, LST 함정에 가득 탄 군인과 피난민들.

미처 함정에 오르지 못한 피난민들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원자탄이 투하된다는 말에 피난 행렬에 나섰다고 한다.

몇 날의 피난 길이 50년이 더 지났다.

▲ 1950. 12. 14. 서울역, 남행 피난민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 1950. 12. 16. 흥남,

국군과 유엔군들이 후퇴하고자 부두에서 수송선을 기다리고 있다.

▲ 1950. 12. 27. 흥남,

얕은 수심으로 수송선이 해안에 닿을 수 없자

유엔군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LST로 가고 있다.

▲ 1950. 12. 24. 흥남, 유엔군들이 철수 후 부두를 폭파시키고 있다.

▲ 1950. 12. 19. 묵호,

흥남에서 철수한 장비를 묵호(동해)항에 내리고 있다.

▲ 1950. 12. 28. 서울,

피난민들이 강추위 속에 한강 얼음을 깨트리며 나룻배로 남하하고 있다.

▲ 1951. 1. 5. 피난 행렬 속의 소년과 소녀.

소달구지가 힘겨워하자 힘을 보태고 있다.

▲ 1950. 10. 11. 서울 교외,

부서진 북한군 전차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 1950. 11. 1. 전란으로 폐허가 된 서울.

▲ 1950. 12. 28. 끊어진 한강 철교, 오른쪽은 임시로 만든 부교.

▲ 1951. 1. 3. 한강 철교 부근의 언 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 1951. 3. 16. 서울 중구의 수도극장(현 스카라 극장) 일대.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광화문 세종로 일대.

▲ 1951. 3. 16.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왕십리 일대,

멀리 고려대학교 건물이 보인다.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서울역 일대.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경복궁, 수송동, 팔판동 일대.

▲ 1951. 3. 19. 구호 양곡을 먼저 탄 소년과양곡을 타기 위해 줄을 선 주민들

▲ 1950. 10. 12. 원산. 학살된 시신들.

▲ 1950. 12. 11. 고단한 피난길.

▲ 1950. 12. 16. 폭격에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교.

▲ 1950. 12. 17. 보급품을 실은 화물 열차가 폭격에 불타고 있다.

▲ 1950. 12. 18. 대구.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친 신병들이 전선으로 가고자

대구역전 광장에집결해 있다

▲ 1950. 12. 18. 전방으로 떠나는 신병들.

1950. 12. 18. 대구역. "총알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예든동 살아오이라.

"'어무이 걱정 꽉 붙들어 매이소. 어무이 아들 아잉기요. 내는 꼭 살아돌아올 깁니다."

1950. 12. 21. 경북 왜관. 낙동강 철교 어귀에 부서진 북한군 소련제 탱크.

 

▲ 1951. 1. 20. 아버지와 아들의 피난길, 다른 가족은 전란에 모두 죽었다.

▲ 1950. 6. 18. 6.25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 (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을 살피고 있다. (덜레스 오른쪽 신성모 국방장관).

▲ 1950. 6. 18. 미 국무장관 덜레스 일행이 38 접경 지대를 살피고 있다.

▲ 1950. 7. 한미 수뇌부들이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병옥 내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무초 주한 미대사, 임병직 외무장관, 워커 주한 미군 사령관).

▲ 1950. 7. 26.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는 중, 종군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 워커 장군.

▲ 1950. 8. 15.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은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 1950. 8. 18. 백선엽 장군(가운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있다.

▲ 1950. 9. 16. 구포 신병 훈련소에서 훈시하는 이승만 대통령.

▲ 1951. 2. 7.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

▲ 1951. 2. 15. 대한민국 해상 이동방송선(HLKT)을 방문한 장면 총리 일행.

▲ 1951. 9. 콜트 미 8군 부사령관의 이임식장 (왼쪽부터 허정, 콜트.무초주한 미대사).

  

6·25 전쟁 중 육군본부 작전국장이었고, 그 후 합참의장을 지낸 張昌國(장창국) 장군은 <문교부 통계에 의하면 휴전까지 5만 여 명의 學徒兵이 직접 전투에 참전하였고, 그중 7000여 명이 戰死했다>고 자신의 手記에서 밝혔다.

전쟁기념관 6·25 전쟁실에는 학도병 코너와 함께 전국 349개 중학교(1950년엔 6년制 중학이 있었고, 고등학교가 따로 없었다) 출신1976명이 戰死한것이 기록된 동판이 걸려 있다. 학도병 戰死者가 많은 중학교 랭킹  군산중학교가 97명으로 전국 最多, 다음으로 경북中 53명,  전주북中 52명, 경주中 48명, 제주 서귀포 농업中과 군산 상업中 각 45명, 순창 농림中 37명, 서울中 30명 순으로 戰死者가 수가 기재돼 있다.

이 자료는 1955년 문교부와 중앙학도호국단에서 발간한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에서 발췌한 것으로 밝혀졌다. 군산중학교 출신인 文精一(문정일)씨는  몇 년간 군산중학교 출신 學徒兵 발굴에 앞장서 온 사람이다.

현재 군산중학교 교정에는 學徒兵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文씨를 비롯한 군산중학교 동창들이 母校 출신 학도병 戰死者와 參戰者를 발굴하고 이들을 기리기 위해 2003년에 세운 것이다.

군산중학교 출신 學徒兵 戰死者를 당시 학적부와 대조해 확인한 결과 전쟁기념관 동판의 전사자 수보다는 적은63명의 학도병 전사자를 확인했다. 군산中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전국 최다 學徒兵 戰死者가 발생한 것일까?

당시 군산중학교 4학년이던 崔榮九씨는 국군이 전열을 가다듬을 틈도 없었던 1950년 7월14일자로 입대했다.

이즈음 인민군은 대전을 공격하고 있었다. "어느 소령 모병관이 사병 몇 명을 데리고 군산에 왔습니다.

7월10일경 학생들을 군산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고 '18세 이상은 지원입대하라'고 독려했습니다. 그때 군산中 전교생이 2500명 가량 되었는데 4학년 이상을 위주로 거의 500명 정도가 입대했을 겁니다. 신체검사도 없었고, 17세가 되지 않은 사람도 많았어요."

군산중학교의 崔씨를 비롯 군산 상업中, 군산 영명中, 군산사범학교, 전주남中, 전주북中 등 전북지역의 많은 학생들은 기차로 군산역을 출발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훈련을 제대로 받을 겨를 없이 이들은 곧 낙동강 방어선인 포항전투와 하동전투 등에 투입되었다.

정부가 대전까지 피란을 내려온 7월 초, 비상학도대 외의 다른 한 무리의 학생들은 '의용학도대'를 조직했다.

7월19일 대구에서 비상학도대와 의용학도대는 통합, '대한학도의용대'로 개편하여 활동했다.

당시 국군 10개 사단 중에는 대한학도의용대를 통하여 출정한 학도의용군이 없는 부대가 없을 정도였다. 學徒兵들은 개전 초기에 안동, 낙동강, 다부동, 안강, 영천, 포항 등 국군의 최후 교두보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거나 방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대구농림중학생으로 참전했던 柳亨錫씨는"당시 중학생들의 의식수준과 긍지는 오늘날의 대학생보다 한 수 위였고, 당시 우리 사회 최고 엘리트였다"고 말했다. 중학생들은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해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에 대한 봉사심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

1950년 가을 총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아군은 약 20만 명의 추가 병력이 필요한 상태였다. 당시 모병이 가능한 지역은 경남북 일대. 정부는 경남북 일대 곳곳을 다니며 18~30세까지는 눈에 보이는 대로 강제로 입대시켰다.

전쟁 당시 안동 농림중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林一宰씨는"안동농中 배속장교의 연설을 듣고 參戰을 결정한 친구들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에 전국 학교에서 두 번째로 많은 戰死者(53명)를 낸 것으로 기록된 경북中 학생들은 거의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學徒兵으로 입대했다.

경북中 32회 졸업생 중 學徒兵으로 나간 사람은 盧泰愚 前 대통령을 비롯 鄭鎬溶 국방부 장관, 權五琦 前 부총리, 정신과 전문의 李時炯 박사의 형 李暾炯씨 등이 있다. 당시 慶北中 조귀순 교장의 아들 조성환씨는 學徒兵으로 지원해 6사단 2연대에 배속되었으나, 초산에서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다.

그는 탈출했으나 국군에게 붙들려 인민군이 수용된 거제도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반공포로 석방時 풀려났다. 대구에서 경북中 다음으로 많은 21명의 학도병 희생자를 낸 대구商中은 6·25 이틀 전에 전국고교야구를 제패했다.

청룡기 깃발을 들고 왔던 야구부 주장 朴相浩군도 참전하여2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戰死했다. 낙동강 방어 전선으로 달려가는 學徒兵들이 줄을 잇고 있을 때, 포항과 맞닿은 경주 쪽 사정도 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金三洙씨는 당시 경주중학교 5학년으로 17세였다.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에는 경주중학교가 48명의 戰死者를 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밖에 경주 문화中, 경주 공업中에서도 많은 學徒兵 戰死者가 났다.

<이 글은 月刊朝鮮 2004년 12월호 '심층취재,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이상흔 기자)를 발췌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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