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죽음과의 첫 만남 3부◈
울산의 산 중턱에서 화전을 일구고 살 때 산 아래 단양군 대강
면에 대강 보통학교가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심리가 먼 산길을 걸어 대강 보통학교에 다니도록 했다. 풀뿌리로 연명하다시피 하는 화전민 시절에 나는 처음으로 신식 힉문과 만났다. 가난과 불행도 세월이 가면 익숙해지나 보다. 나도 가난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내가 아홉 살이 되던 1922년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을 데리고 예천으로 이사했다. 산에서 내려와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돌아온 것이었다. 큰형 위경이 행상을 하여 간신히 남의 집 곁방이나마 자리를 잡았으므로 큰형에게 합류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난하기는 화전민 시절이나 마을에 돌아와서나 별다를
그것이 없었다. 어쨌든, 이때부터 우리는 노상동 ,노하동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예천읍에서 살았다. 예천이 고향처럼 돼버린 것은 이 때문이었다.
예천으로 나온 지 이태 후인 1924년, 열한 살이 된 나는 사설학원인 대창학원(大昌學院) 3학년으로 편입했다. 당시 학제는 공립학교로서 일본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학교와 조선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보통학교가 전국 각지에 설립되어 있었고, 여기에 병행하여 4년제 사설 학교가 간간이 있었다.
이는 지방의 뜻있는 유지들이 보통학교도 다니기 어려운 아이들을 위하여 뜻을 모아 세우거나, 공립학교가 너무 먼 곳에 있어 지역적으로 교육의 기회에서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 그 지역주민들이 합심하여 만든 학교들이었다.
대창학원은 예천 지역의 애국자·유지들이 민족교육을 위하여 세운 학교로 향교를 빌려 교실로 사용했다. 시설이나 선생이 모두 부족한 편이어서 공립학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으나 가르치고 배우려는 열의는 오히려 공립학교보다 더 뜨거웠다. 학생이 6백여 명이나 되었으니 적은 수는 아니었다.
/4부~~계속~~>>-시 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