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죽음과의 첫 만남 2부◈
그러나 이러한 무력 항쟁의 뿌리를 뽑으려는 왜경의 토벌작전은 더욱 치밀해져 결국 1920년 아버지는 왜경에게 붙잡혀 안동경찰서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안동경찰서에서 투옥되었던 아버지는 특유의 완력으로 유치장을 부수고 탈출에 성공했다.
경찰서 유치장을 부수고 탈출하기란 쉬운 일도 아니었고 흔히 일어나는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탈옥 사건은 그 지방에서 두고두고 신화로 화자 될 정도였다. 그러나 가족에게는 무서운 형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거덜 난 집안은 아버지의 탈옥 이후 완전히 이 지방의 삶에서 뿌리가 뽑혔다.
풍기 땅에선 이제는 발붙이고 살 수가 없었다. 나는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었으나 우리가 왜 고통의 바닷속으로 떠밀려야 했는지 그 원인을 알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다.
안동경찰서 유치장을 부수고 탈옥한 아버지는 그 후 종적을 감추었다. 우리는 풍기 땅을 떠나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거지와 같은 유랑생활을 했다. 이것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인생살이 시작 무렵의 첫 풍경이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1914년, 경상북도 풍기읍 금계동 506번지에서였다. 아버지 송도식은 3대 독자였고, 어머니 신동경(申東卿) 맞아 슬하에 5남 1녀의 여섯 자식을 두었다. 나는 속명이 홍근(鴻根) 으로 6남매 중 셋째였다. 아버지가 3대 독자였으므로 우리에게는 가까운 친척이 없었다. 그때문에 집안이 망해도 달리 어디 의지할 곳이 없었다. 중농 집안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던 어머니 신동경은 하루아침에 집안 거덜 나자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안동·동양·예천·문경. 등지를 떠돌며 고달픈 유랑생활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일가족의 참담한 고생길이 시작되었다.
당장 비를 피하여 누울 곳이 없어 남의 집 추녀 밑이나 빈 헛간을 찾아 비바람을 피했다. 그러다가 산속의 버려진 기왓골을 둥지 삼아 몸을 의탁하였다. 기와를 굽기 위해 만들어 놓은 긴 동굴이었다. 밤이나 낮에나 칠흙처럼 어두웠고, 축축하여 한기가 들었다. 온갖 벌레들이 기어 다녔고 뱀가지 나왔다. 자고 나면 뱀이 똬리를 틀고 옆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뱀을 쫓기 위해 머리카락을 태웠으나 소용없었다.
나는 어둠에 대한 공포증이 유달리 심했다. 어둡기만 하면 울다가 까무러치기도 했으므로 어머니는 기왓골 속에 관솔불이라도 밝히려고 필요 없는 고생을 해야만 했다. 내가 어둠을 무서워했던 것은 일본 순사들 때문이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나타나 군홧발로 사정없이 차며 깨웠다. 그들은 남의 집 헛간이나 기왓골, 그리고 화전민의 움막까지 극성스럽게 따라다녔다. 아버지의 행방을 캐기 위해서였다.
경상북도 예천군과 충청북도 단양군의 접경 소백산 중턱에 올산(兀山)이라는 곳이 있다. 우리는 그 깊은 산중에서 화전민 노릇을 하며 살았다. 두 사람 다 제 한 몸 추스르기도 어려워 가족들을 부양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 할 일이었다.
어머니는 형제 중에서 유독 나만은 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다. 남의 집 헛간이나 기왓골을 전전하면서도 근처에 서당이 있으면 가서 글을 배우게 했다. 내가 한문 공부를 시작한 것은 이런 형편 속에서였다.
/3부~~계속~~>>-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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