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범미전(荊凡未全)
서주(西周) 시절 이야기다. 초왕(楚王)과 범군(凡君)이 마주 앉았다. 초왕의 신하들이 자꾸 말했다. "범은 망했습니다." 망한 나라 임금하고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세 번을 거듭 얘기하자 범군이 말했다. '범나라는 망했어도 내가 있지 않소. 범나라가 망해도 나의 실존을 어쩌지 못한다면 초나라가 존재함도 그 존재를 장담치 못할 것이오. 이렇게 보면 범은 망한 적이 없고, 초도 있은 적이 없었소.' '장자'의 '전자방(田子方)'에 나온다.
있고 없고, 얻고 잃고는 허망한 것이다. 있다가 없고, 잃었다가 얻는 것이 세상 이치다.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고, 잃었어도 그걸로 끝이 아니다. 사람들은 잠깐의 존망에 안절부절못하며, 옳고 그름보다 득실만 따진다.
송준길(宋浚吉)이 유계(兪棨)의 만사에서 말했다. '살고 죽음, 그 누가 늘 마음에 두겠는가. 오르내림 예로부터 하늘 뜻 아님 없네. 의화(毅和) 선표(單豹) 모두 다 죽은 것 탄식하니, 형(荊)과 범(凡)이 보전치 못했음을 내가 아네(存沒幾人常在念, 升沈從古孰非天. 堪嗟毅豹均爲死, 定識荊凡各未全).'
죽고 살고가 무슨 큰 문제며, 오르고 내림을 내 뜻으로 어이 하리. 선표는 제 힘을 믿고 험한 길을 가다가 주린 범에 물려 죽었고, 장의는 평생을 삼갔어도 열병에 걸려 방안에서 죽었다. 형(荊)과 범(凡), 즉 초나라와 범나라도 결국은 다 망했다. "왜 저런 것과 상대합니까?"하며 대놓고 무시하던 그 신하들도 흙이 된 지 오래다.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는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에서 노래한다. '손을 마주 잡고서 맹세를 하자마자 머리도 돌리기 전 모두 틀어지누나. 장(藏)과 곡(穀)은 다 잃었고, 형과 범은 다 망했지. 정신으로 말을 삼고, 박을 갈라 술잔 하리(纔握手而相誓, 未轉頭而皆非… 臧穀俱亡, 荊凡孰存. 以神爲馬, 破瓠爲樽).'
변치 말자고 웃으며 맹세하고는 돌아서서 서로를 비난한다. 장은 책을 읽다 양을 잃었고, 곡은 노름을 하다가 양을 잃었지만, 잃은 것은 똑같다. 잘나가던 초나라나 이미 망한 범나라나 지금은 다 사라졌다. 허망한 것에 마음 쓰지 않겠다. 덧없는 것들에 줄 시간이 없다. 광대무변한 정신의 세계에서 신마(神馬)를 타고 노닐리라.//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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