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슬지공(一膝之工)
김간(金榦·1646~1732)의 독실한 학행은 달리 견줄 만한 이가 없었다. 하루는 한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독서에도 일슬지공(一膝之工)이 있을는지요?" 일슬지공이란 두 무릎을 한결같이 바닥에 딱 붙이고 하는 공부를 말한다.
스승의 대답은 이랬다. "내가 예전 절에서 책을 읽을 때였지. 3월부터 9월까지 일곱 달 동안 허리띠를 풀지 않고, 갓도 벗지 않았네.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 잔적도 없었지. 책을 읽다가 밤이 깊어 졸음이 오면, 두 주먹을 포개 이마를 그 위에 받쳤다네. 잠이 깊이 들려 하면 이마가 기울어져 떨어졌겠지. 그러면 잠을 깨어 일어나 다시 책을 읽었네. 날마다 늘 이렇게 했었지. 처음 산에 들어갈 때 막 파종하는 것을 보았는데, 산에서 나올 때 보니 이미 추수가 끝났더군."
세상에나! 그는 목욕 한번 안 하고 늦봄부터 삼복더위를 지나 초겨울을 코앞에 두고서야 산에서 내려왔다. 고승대덕의 앉아 절대 눕지 않는다는 장좌불와(長坐不臥)는 들어보았지만, 산사에 공부하러 간 선비가 7개월간 허리띠도 풀지 않고 눕지도 않은 채 공부만 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신돈복(辛敦復·1692~1779)의 '학산한언(鶴山閑言)'에 실려 있다.
김흥락(金興洛·1827~1899)이 사위인 장지구(張志求)에게 준 편지에도 "산속 집에서 일슬지공을 겨우내 온전히 해냈으니 얻은 바가 반드시 얕지 않겠네(山齋一膝之工, 穩做三餘, 所得必不淺矣)"라 한 말이 나온다. 이런 독공(篤工)이 있고서야 공부에서 비로소 제 말이 터져 나온다. 다산은 책상 다리로 두 무릎을 딱 붙이고 공부하느라 튀어나온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 해서 과골삼천(踝骨三穿)의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진다.
중종 때 양연(梁淵·?~1542)은 공부에 뜻이 없어 놀다가 나이 마흔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왼손을 꽉 쥐고서 문장을 이루기 전에는 결단코 이 손을 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몇 해 뒤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여 꽉 쥔 왼손을 펴려 하자 그 사이에 자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가 펼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것은 또 조갑천장(爪甲穿掌)의 고사로 회자된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엉덩이와 무릎으로 한다.//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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