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 양배추, 멜론, 오이가 있는 정물화'
후안 산체스 코탄
(Juan SaWnchez CotaWn·1561~1627)의 1602년 작,
선반 위에 야채들이 있다. 상하지 않도록 실로 묶어 허공에 매달아둔 모과와 양배추, 3분의 2쯤 남은 멜론과 오이다. 반들반들하게 닦아 둔 모과에서는 짙은 향이 배어 나온다. 양배추는 벌써 겉잎의 가장자리부터 메말라 시들기 시작했다. 얌전히 잘라낸 멜론 조각엔 씨를 발라내고 먹기 좋게 칼집을 내두었다. 남은 멜론의 부드러운 과육엔 칼자국을 따라 씨앗이 하나 붙어 있다. 짙푸른 오이 표면엔 까칠한 가시가 성하다. 초고화질 카메라로 접사촬영을 한들 이렇게 선명할까 싶을 정도로 사실적인 이 그림은 17세기 스페인 정물화의 황금기를 이끌어낸 후안 산체스 코탄(Juan SaWnchez CotaWn·1561~1627)의 1602년 작, '모과, 양배추, 멜론, 오이가 있는 정물화'다.
코탄은 극적인 명암의 대비를 활용하여 야채의 질감을 만져질 듯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림자를 드리우며 선반에 반쯤 걸쳐 있는 오이는 정말로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극도로 사실적이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야채들은 티끌 하나 날리지 않는 정갈한 공간 속에서 새까만 어둠을 배경으로 강렬한 조명을 받으며 자로 잰 듯 반듯한 포물선을 그리고 있다. 이들은 일용할 양식이라기보다는 마치 기하학의 원리와 수학적인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누군가가 엄격하게 배열해 둔 도형처럼 보인다.
성공한 화가였던 코탄은 40대에 돌연 속세를 버리고 청빈과 정결, 침묵을 서원하는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으로 출가했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알 수 없는 신비감을 자아내는 코탄의 정물화가 마치 그의 미래를 예견한 것 같다. /우정아 서양미술사학자/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