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얼굴

시 두레 2017. 8. 14.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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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얼굴

1. 흰 옷 입은 사제처럼 시간은 새벽마다 신의 이름으로 우주를 축성하네. 오래 되어도 처음 본 듯 새로운 시간의 얼굴.

그는 가기도 하지만 오는 것임을 나는 다시 생각해 보네. 오늘도 그 안에 새로이 태어나네.

2. 나이 들수록 시간은 두려움의 무게로 다가서지만 이제 그와는 못할 말이 없다.

슬픔도, 기쁨도, 사랑도, 미움도 그에겐 늘 담담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다.

3. 내가 원치 않는 필름까지 낱낱이 현상해 두었다가, 어느 날 내게 짓궂게 들이대는 사진사처럼 시간 앞엔 나를 조금도 속일 수 없다.

그 앞엔 참 어쩔 수 없다.

4. 어느 날, 시간이 내게 보낸 한 장의 속달 엽서를 읽는다.

'나를 그냥 보내 놓고 후회한다면 그건 네 탓이야, 알았지?

나를 사랑하지 않은 하루는 짠맛 잃은 소금과 같다니까, 알았지?'

5. 내가 게으를 때, 시간은 종종 성을 내며 행복의 문을 잠거 버린다.

번번이 용서를 청하는 부끄러운 나와  화해한 뒤, 슬며시 손을 잡아 주는 시간의 흰 손은 따스하고 부드럽다.

6. 자목련 꽃봉오리 속에 깊이 숨어 있던 시간들이 내게 사랑의 수화(手話)를 시작한다.

소리 없이도 우리는 긴 말을 할 수 있다. 금방 친해질 수 있다.

7. 기도 안에서 항아리에 가득 채워 둔 나의 시간들.

이웃을 위해 조금씩 그 시간을 꺼내 쓰면 어느새 신()이 오시어 내가 쓴 것보다 더 많은 분량을 채워 주신다.

8. 내가 깨어 있을 때만 시간은 내게 와서 빛나는 소금이 된다.

염전(鹽田)에서 몇 차례의 수련을 끝내고 이제는 환히 웃는 하얀 결정체.

내가 깨어 있을 때만 그는 내게 와서 꼭 필요한 소금이 된다.

9. 침묵의 시간이 피워 낸 한 송이의 눈부신 말의 꽃.

()이 축복하신 그 희디흰 꽃잎 위에 오늘의 햇살과 함께 한 마리의 고운 나비를 앉히고 싶다.

10. 어느 날, ()로 태어날 나의 언어들을 시간의 항아리에 깊이 묻어 두고, 오래오래 기다리며 사는 기쁨.

한 잔의 향기로운 포도주로 시가 익기도 전에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시간은 돌보아 줄까.

썩어서야 향기를 풍길지 모르는 나의 조그만 언어들을.

11. 한 마리의 자벌레처럼 나는 매일 시간을 재며 걷지만, 시간은 오히려 넉넉한 눈길로 나를 기다릴 줄 아네.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곱게 피었다 지는 한 송이 보랏빛 붓꽃처럼, 자연스럽게 왔다가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조용한 시간이여.

12. 시간은 날마다 지혜를 쏟아 내는 이야기책. 그러나 책장을 넘겨야만 읽을 수 있지.

살아 있는 동안 읽을 게 너무 많아 나는 행복하다. 살아 갈수록 시간에겐 고마운 게 무척 많다.

13. 시간이 어둠 속에 나를 깨운다.

잠 속에 딩구는 어제의 꿈을 미련 없이 털어내고, 신이 나를 기다리는 아침의 숲으로 가자고 한다.

14. 종소리 속에 음악이 되어 실려 오는 수도원의 시간. 제단 위에 촛불로 펄럭이며 나를 부르는 시간.

높게, 넓게 그리고 더 깊이 기도할수록 시간은 거룩하다. 조용히 내게 와서 노래가 된다.

15. 죽음이 모든 것을 무()로 돌린다 해도 진실히 사랑했던 그 시간만은 영원히 남지.

16. 죽지 않고는 사랑을 증거할 수 없던 예수의 시간. 눈물 없이는 아들을 기다릴 수 없던 마리아의 시간.

의심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던 제자들의 시간. 믿고, 기다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힘들고 아픈 시간.

이 모든 시간들 속에 거듭거듭 태어나고 성장하는 너와 나의 삶.

17. 시간이 내게 와서 말을 거네. 슬픔 중에도 마음을 비우면 맑은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미래는 불확실해도 죽음만은 확실한 것이니 잘 준비하라고...

18. 시간을 따라 끝까지 가면, 잘 참고 견디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는 예수의 말씀을 좀 더 깊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

목숨 바친 봉헌의 삶이어도, 아직 자유인이 못 된 나는 때때로 울면서 하늘을 보네.

19. 무서운 태풍 속에 나를 질책하던 시간의 목소리. 그 부드러움과 여유는 다 어디로 갔을까?

물난리에 휩쓸려 간 내 이웃들이 목쉰 소리로 나를 부르는 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흰 벽 위의 십자가만 바라보며 잠 못 이루네.

20. 사랑하는 이의 무덤 위에, 시들지 않는 슬픔 한 송이 꽃으로 피워 놓고 산에서 내려오는 길.

사랑으로 피 흘리며 행복했던 우리의 지난 시간들이 노을 속에 타고 있네.

죽음이 끝이 아님을 믿고 또 믿으며 젖은 마음으로 내려오는 길.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 해. 기쁘게 살아야 해' 라고 어느새 내 곁에 와서 신음하듯 뇌며 부축하는 오늘의 시간이여. /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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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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