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紅流洞 (출홍류동) 홍류동을 나오며
石面紛紛墨間紅(석면분분묵간홍)바위 위에 여기저기 검고 붉은 먹물 글씨
山頭日日雨和風(산두일일우화풍)산 위에는 하루하루 비 뿌리고 바람 부네.
人生自有傳名處(인생자유전명처) 인생에는 본래부터 이름 남길 곳 있나니
不在鼪林鼯穴中(부재 생림 오혈중)날다람쥐 숲과 굴은 그런 데가 아니라네.
구한말 영남의 저명한 유학자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1873~1933)이 가야산 해인사 홍류동 계곡을 찾았다. 홍류동은 계곡이 깊고 길며, 풍광이 수려하여 예로부터 지금까지 명승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물소리를 들으며 계곡의 풍광을 즐기던 심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절벽이든 물속이든 빈 공간만 있으면 크고 작은 이름들을 새기고 붉고 검은 먹물을 들여놓아서다. '나 아무개는 이 명승을 왔다 가노라!' 고 증언하는 수백 년 세월을 겪은 각자(刻字)다. 거창하게 글자를 새겨 후세에 이름을 남기려는 욕심의 서툰 흔적은 그저 아름다운 풍광만 더럽힐 뿐이다. 이름이란 날다람쥐의 소굴인 산중의 바위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남겨야 할 것이다. 천 년 .전 최치원은 이름 각자를 남기지 않았어도 지금껏 홍류동의 명사로 유명하지 않은가! 자기 존재를 알리는 법은 무엇일지 생각하게 한다.//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