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中訪友人不遇(설중방우인불우)
눈밭에 쓴 편지
雪色白於紙(설색백어지) 눈빛이 종이보다 새하얗기에
擧鞭書姓字(거편서성자) 채찍 들어 이름 석 자 써 두고 가니
莫敎風掃地(막교풍소지) 바람아 부디 눈을 쓸지 말고
好待主人至(호대주인지) 주인이 돌아오기 기다려다오.
고려의 문호 이규보(李奎報·1168 ~1241)가 30세 전후하여 지었다. 공직에 진출하지 못해 불안과 불만의 세월을 보내던 시절이었다. 눈이 많이 내린 어느 날 말에 올라타 친구를 찾아갔으나 친구는 외출하여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집 안에 들어가 기다리지도 않았고, 또 그냥 돌아오지도 않았다. 발길을 되돌려 나오다가 집 앞 하얀 눈밭에 제 이름 석 자를 써놓았다. 그리고 바람에게 당부하였다. 주인이 돌아와서 볼 수 있도록 내 이름을 덮어버리지 말아 달라고. 눈 속에 친구를 찾아간 것도 운치 있는 일이지만, 그 집 식구가 아닌 눈밭에 내가 왔다 가노라는 사연을 명함처럼 박아놓은 것도 운치 있는 일이다. 집에 돌아온 친구가 그 이름을 보고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 젊은 친구들에게는 직접 만나 쏟아놓을 한없는 사설보다 순백의 설원에 써놓은 무언의 대화가 더 큰 위로가 되었으리라.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조선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