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계량(卞季良·1369~1430)의 '이재와 김대언의 시운을 차운함(次頣齋及金代言詩韻)' 7수 중 마지막 수. '내 생애 다행히 후한 은혜 입었건만, 여린 시내 물결 보탬 얻지 못해 부끄럽네. 산보(山甫)가 임금 곁에서 진작 보필했더라면, 두보가 어이 굳이 유관(儒冠) 탄식하였으리. 김을 매자 마침내 소반 위 밥이 되고, 물병 얼어 천하가 추워짐을 알 수 있네. 교화에 참여하여 지치(至治)를 이룰진대, 여자는 베가 남고 남자는 곡식 남을 텐데(吾生幸沐睿恩寬, 愧乏微涓得助瀾. 山甫早能陪袞職, 少陵何必歎儒冠. 鋤禾竟是盤中粒, 甁凍可知天下寒. 參贊會須登至治, 女多餘布士餘餐).'
의미는 이렇다. 은혜를 입어 벼슬길에 올랐지만 정작 나라 위해 내세울 만한 일을 한 게 없어 부끄럽다. 주나라 선왕(宣王) 때 중산보(仲山甫)는 제(齊)나라에 성(城)을 쌓고 오라는 명을 받아 떠나면서 곁에서 임금을 보좌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위태롭던 나라를 중흥시킨 명재상이다. '시경' '증민(烝民)'에 보인다. 두보는 "유관(儒冠)이 몸을 망친 일이 많다네(儒冠多誤身)"라 해서 올곧은 선비가 임금의 알아줌을 얻지 못해 일생을 궁하게 사는 것을 탄식했다.
애초에 품은 꿈은 그렇지가 않았다. 여름내 부지런히 김을 매서 추수를 한다. 물병의 물이 언 것을 보고 날씨가 추워짐을 안다. 시의 뜻은 이렇다. 모든 일이 순리대로 이루어진다면 좀 좋으련만 뜻 높은 그들에게 지극한 다스림에 참여할 기회는 오지 않고 불우를 곱씹으며 먼 곳을 떠도니 안쓰럽다는 얘기다.
서화반립(鋤禾盤粒), 벼를 김매 소반 위의 밥을 얻는다. 정직한 땀방울의 의미를 알겠다. 병동지한(甁凍知寒)! 물병의 물이 언 것을 보고 날씨가 추워진 것을 안다. 연찬(硏鑽)의 몰두 속에서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몰랐다. 물을 마시려 물병을 기울이자 얼음이 버석대 겨울이 온 줄을 비로소 알았다. 이렇게 올곧게 노력해도 세상의 득의는 만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잔머리 굴리고 얕은꾀를 써서 수단만 부리려 들면 성취에 가까울수록 파멸의 재앙이 그만큼 빨리 다가선다.//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