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풀밭에서는
풀들의 몸놀림을 한다.
나뭇가지를 지날 적에는
나뭇가지의 소리를 낸다….
풀밭에 나뭇가지에
보일 듯 보일 듯
벽공에
사과 알 하나를 익게 하고
가장자리에
금빛 깃의 새들을 날린다. /김춘수(1922~2004)
바람이 지나간다. 희맑은 바람이 지나간다. 풀밭에 가서는 풀의 행세를 한다. 풀처럼 눕고 풀처럼 일어선다. 나뭇가지에게 가서는 나뭇가지가 되어 제 몸을 흔든다. 벽공(碧空)에, 푸른 하늘에 언뜻 스치고 지나간다. 한 알의 사과 알을 붉게 익게 한다. 새의 금빛 깃을 날리게도 한다.
바람은 모든 것과 잘 호응한다. 부름에 잘 응답한다. 사람의 호흡 속에 살기도 하고, 한 그루 수양버들 속에 몸을 길게 늘어뜨리기도 하고, 산마루에 높이 오르기도 하고, 단풍잎에 올망졸망 매달려 있기도 하고, 환한 햇빛 속에 눈부시게 서 있기도 한다. 물처럼 흐르고 흘러 가리는 것이 없다. 활짝 트여 마음을 후련하게 한다. 그 눈짓도 참 좋다.// 문태준 시인 /그림;송준영/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