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특이한 임금이었다.경연(經筵)에서 신하의 강의를 듣지 않고 자신이 직접 강의를 했다. '시경'을 강의할 때 전후로 내준 숙제만 800문항이 넘었다. 큰 학자라도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 많았다. 신하들은 끊임없는 임금의 숙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 강의에서 단연 이채를 발한 학생은 정약용이었다.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척척 대답해서 제출했다. 정조가 다산의 답안지에 어필(御筆)로 내린 평가가 이랬다. "백가의 말을 두루 인증해 출처가 끝이 없다. 평소의 온축이 깊고 넓지 않고는 이렇게 할 수가 없다." 다산의 작업 비결은 생활화된 메모의 습관에서 나왔다. 옛글을 읽다가 한 구절이라도 '시경'을 인용하거나 논한 내용이 나오면 무조건 기록해 두었다. 별도의 공책에 '시경' 편차에 따라 정리해 두었다. 오래 계속하자 작품마다 이 책 저 책의 언급 내용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임금의 800개가 넘는 질문이 대부분 이 범위 안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숙제가 나오면 그때부터 관련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하나를 겨우 찾고 나서 그다음 것은 또 처음부터 찾아야 했다. 한 사람은 서랍 속에 차곡차곡 넣어놓고 필요할 때 꺼내 썼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때마다 물건을 찾아 동네 가게를 온통 헤매고 다녔다. 속도와 효율 면에서 당할 사람이 없었다.
다산은 이때의 문답을 정리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짓고, 미처 못 쓴 나머지 메모로는 '풍아유병(風雅遺秉)'이란 책을 엮었다. 유병(遺秉)은 추수 끝난 논바닥에 남은 벼이삭이다. 나락 줍기의 뜻이다. '논어고금주'도 이런 메모 작업의 결과였다. 다산은 둘째 형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람들이 사서(四書) 분야에는 남은 이삭이 없다고 말하지만 자신이 직접 살펴보니 도처에 체수유병(滯穗遺秉)이더라고 했다. 체수는 낙수(落穗)와 같은 의미다. 여기저기 떨군 벼이삭과 남은 나락이 너무 많아 이루 다 수습할 수가 없을 정도라고 했다.
논문을 쓰는 대학원생들은 남이 안 쓴 주제는 어려워 못 쓰겠고,쓰고 싶은 것은 이미 다 써 할 말이 없다고 푸념한다. 추수 끝난 빈 들판에 떨어진 나락이 무수한 줄을 몰라 하는 소리다.//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