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興仁門樓(등흥인문루)흥인문에 오르다
永濟橋頭泥沒膝(영제교두이몰슬)
영제교 다리 끝은 무릎까지 진펄에 빠지고
水芹齊葉柳陰晴(수근제엽유음청)
우쭐 자란 미나리 밭으로 버들은 그늘을 드리웠네.
斜陽馬繫虹蜺影(사양마계홍예영)
석양 아래 매어놓은 말 위로 무지개가 뜨고
廣陌人看螻蟻行(광맥인간루의행)
넓은 대로의 행인들은 개미처럼 걸어가네.
接宅園林皆貴戚(접택원림개귀척)
담을 이어 정원이 있는 저택들은 모두가 왕실 인척의 소유이고
滿城歌管卽昇平(만성가관즉승평)
왕성 안을 가득 메운 풍악 소리는 태평성대를 노래하네.
頻來頻去何鄕客(빈래빈거하향객)
자주 왔다 자주 가는 나는 대체 웬 고을의 과객인가?
獨倚門樓第五楹(독의문루제오영)
흥인문 문루의 다섯 번째 기둥에 홀로이 기대 서 있네.
조선 숙종 때 시인 유유자(悠悠子) 이희(李熺)의 시다. 그는 이완(李浣) 대장의 서손(庶孫)으로 벼슬 한자리 얻지 못한 채 경기도 여주에 살았다. 언젠가 서울에 왔다가 동대문 문루에 올라가 성 안팎을 둘러보았다. 성 밖 길은 무릎까지 빠지는 진펄이 이어지고, 버드나무 가로수 너머로 미나리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성 안쪽 종로는 개미가 기어가듯 행인들로 들어찼다. 거창한 정원의 대저택이 담을 잇고, 밤을 재촉하는 풍악 소리가 요란하다. 내가 몸과 마음을 붙일 곳은 저 번화한 풍경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자주 들락거리는 나는 뭘 해보자는 걸까? 문루의 기둥 하나에 기대 저무는 왕성을 하염없이 바라본다.//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