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류나무
큰 비에 두 눈
큰 바람에 입 다물고
하루 내내 견디었소
감고 지긋이 견디었소
이윽고 비바람 자니
일만 잎새 일어나오
/고은(1933~ )
'미류나무'는 '미루나무'로 바뀌었지만 기억 속에는 '미류나무'다(미국에서 들여와 美柳였다). 시골 여름 흙길을 칠칠하게 빛내주던 나무들. 특히 동구의 풍경을 훤칠하게 완성해주던 나무들. 한낮이면 잎사귀들이 얼마나 눈부시게 팔랑거렸던지! 잎자루가 길어 잔바람에도 쉴 새 없이 반짝이는 게 미루나무였다.
그 또한 '큰 바람에'도 '입 다물고' 견뎌낸 푸름이다. '큰 비에'도 '두 눈 감고 지긋이' 길러낸 덕이다. 오직 꼿꼿이 바람에 맞선 채…. '일만 잎새 일어나'는 찬란함은 그런 뒤에야 터지는 것! 어느 나무든 그렇지 않겠는가. 붙박이 운명이니 온갖 '비바람'을 맞받으며 헤쳐 가는 길밖에 없다.
그런 미루나무들을 요즘 길에서는 보기가 어렵다. 느린 생장 탓에 퇴출된 것이다. '조각구름 걸려' 있던 나무 꼭대기에는 누군가의 소원 같은 연도 종종 걸렸었는데…. 볼 때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떠야 했던 키 큰 미루나무들. 자르르 윤기 흐르는 그 잎사귀들 푸른 손짓에 다시 길게 홀리고 싶다.//정수자 ;시조시인/그림;이철원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