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모니터
눈덩이처럼 불어난 당신의 이야기
덜컹 문이 열려 나는 두근거린다
풍문의 발을 따라서 메아리치는 세계
다정한 얼굴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감정의 다발들
커다란 혀를 삼키며 우르르 쏟아진다
세찬 바람이 불고 하늘은 까맣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중심을 잃는다
뜨거운 포옹 앞에서 팔들도 사라진다
거품을 뒤집어쓴다 내 마음의 바깥
문을 닫아걸면 당신은 쓴다, 지운다
불 꺼진 모니터 속에 한 계절이 돌아누웠다
/김보람(1988~ )
모니터에 코 박고 사는 현대인. 그 '전자사막'(이원 시인) 속에서 우리는 유목민이 되어 질주한다. 날마다 쓰고 지우고 사고팔고 울고 웃으며 기꺼이 굽어간다. 일터요 놀이터요 삶터인 전자사막 안의 또 다른 극장과 막장과 행성을 종횡무진하며….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야기에 빠지거나 '거품을 뒤집어' 쓸 적도 있다. 누군가를 향한 난장에 가담할 적도 있다. 그럴수록 모니터를 켜야 만나는 세상! 지금도 '풍문의 발을 따라' 사막을 누비는 키보드들이 뜨겁겠다. 세상이 너무 시끄러울 때 모니터를 꺼보면 거울인 양 나를 비춘다. 자정(自淨)은 그런 침묵 속에 고요히 앉을 때나 찾아오는 찬물 같은 것일까.//정수자:시조시인/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