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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나 물 속처럼 깊이 흘러 어두운 산 밑에 이르면 마을의 밤들 어느새 다가와 등불을 켠다
그러면 나 옛날의 집으로 가 잡초를 뽑고 마당을 손질하고 어지러이 널린 농구들을 정리한 다음 등피를 닦아 마루에 건다
날파리들이 날아들고 먼 나무들이 서성거리고 기억의 풍경이 딱따구리처럼 소리를 내며 달려든다 나는 공포에 떨면서 밤을 맞는다
과거와 현재 사이로 철철철 밤이 흘러간다 뒤꼍 우물에서도 물 차오르는 소리 밤내 들린다 나는 눈 꼭 감고 다음날 걸어갈 길들을 생각한다 /최하림(1939~2010)
일상의 술렁거림과 소란이 잦아든 시간을 맞이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영혼의 눈이 밝지 못해 고요함과 맑음을 얻지 못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빛과 소리에 대한 감각을 회복한다. 푸르고 찬 우물물이 차오르듯이. 그리고 수면처럼 가만히 눈을 감고 시간이 지금 희미하게 지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작은 기척들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최하림 시인이 "사과밭에서는 사과 떨어지는 소리 후두둑 후두둑 들리고"라고 쓴 시구(詩句)를 읽을 때마다 놀라게 된다. 물 흐르는 것처럼 풍경도 움직인다. 기울고 흔들리고 뒤척이고 밀리며 발걸음을 옮긴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로?"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최하림 시인은 풍경의 흘러감을 예민하게 감각한 시인이었다. 그는 시간이 "홑이불처럼 날리면서 가고 있었고"라고 썼다. 실로 모든 풍경은 생생하다.//문태준 시인/조선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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