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 우체국
이름 곱고 담도 낮은 병산 우체국
해변길 걸어서 탱자 울을 건너서
꼭 전할 비밀 생기면
몰래 문 열고 싶은 곳
어제는 비 내리고 바람 살푼 불더니
햇살 받은 우체통이 칸나처럼 피어 있다
누구의 애틋한 사연이
저 속에서 익고 있을까 /서일옥(1951~ )
빨간 우체통 앞에서 가슴 뛰던 청춘들은 휴대폰족(族)이 됐다. 쓰고 찢고 다시 쓰며 편지지에 골라 담던 정갈한 말들도 문자와 카톡 속도에 맞게 변이 중이다. 온갖 이모티콘으로 불꽃 튀는 전령사는 경계가 없어진 만큼 돌아보기도 없다. 그럴 때 어디선가 멀뚱히 서 있는 우체통을 보면 왠지 미안스럽다. 그런 중에도 우체국은 택배 등으로 오늘의 속도를 살아내고 있다.
하지만 '꼭 전할 비밀 생기면/ 몰래 문 열고 싶은' 우체국이라면 다른 풍경. 그 앞에서는 괜히 뭔가 적고 싶어지겠다. 여행길에 스치는 자그마한 우체국들이 똑 그랬다. '햇살 받은 우체통이' 옛 마음을 불러내면 못 보낸 편지들이 하릴없이 그리웠다. 그 섶에 '칸나처럼 피어 있'는 우체통을 만난다면! 없는 사연 지어서라도 고 빨간 꽃잎을 열고 싶어지리. 떨면서 넣은 편지가 툭 떨어지던 소리, 다시 귀 대고 싶다.//정수자;시조시인/그림;송준영/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