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규씨의 '조희룡과 추사파 중인의 시대'(학자원)에 조희룡(趙熙龍·1789~ 1866)의 '향설관척독초존(香雪館尺牘鈔存)'이 실려 있다. 운치 있는 짧은 편지글 모듬이다. 그 중 한 편인 '계숙에게(與季叔)'란 글이다.
'돌의 무늬나 나무의 옹이는 모두 그 물건의 병든 곳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아낍니다. 사람이 재주를 지님은 나무나 돌의 병과 한가지입니다. 자신은 아끼지 않건만 다른 사람이 아끼는 바가 됩니다. 하지만 오래되면 싫증을 내니, 도리어 평범한 돌이나 보통의 나무가 편안하게 아무 탈 없는 것만 못하지요. 사람의 처세는 재(材)와 부재(不材)의 사이에 처하는 것이 좋습니다.'(石有暈, 木之癭, 皆物之病也, 而人愛之. 人之有才, 如木石之病, 不自愛而爲人所愛. 久則見厭, 反不如凡石閒木之自在無恙矣. 人之處世, 可將處材不材之間.)
햇무리 진 돌은 수석(壽石) 대접을 받아 좌대 위에 모셔진다. 나무의 울퉁불퉁한 옹이는 사람으로 치면 암세포 같은 종양이다. 이런 것이 많아야 분재(盆栽)감으로 높이 쳐준다. 그뿐인가. 없는 옹이를 만들려고 철사로 옥죄고, 좌대에 앉히겠다며 멀쩡한 아랫부분을 잘라낸다. 나무나 돌의 입장에서는 재앙을 만난 셈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금방 싫증을 낸다. 얼마 못 가 좀 더 신기한 것이 나오면 거기에 혹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재주를 파는 일은 늘 이렇다. 붕 떴다가 급전직하 추락한다. 그때 가서 평범한 돌, 보통의 나무를 부러워해도 늦었다.
재여부재(材與不材), 즉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에 처하란 말은 '장자' 산목(山木)편에서 따왔다. 산길 옆 큰 나무를 나무꾼이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간다. 연유를 묻자 옹이가 많아 재목으로 못 쓴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날 밤 친구 집에 묵었다. 주인이 오리를 잡아오게 했다. 하인이 묻는다. "잘 우는 놈과 못 우는 놈 중 어느 놈을 잡을까요?" "못 우는 놈을 잡아라." 이튿날 길을 나선 제자가 질문한다. "선생님! 어제 나무는 쓸모가 없어 살았고, 오리는 쓸모가 없어 죽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디에 처하시렵니까?" "응! 나?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에 처할란다. 그런데 그 중간은 얼핏 욕먹기 딱 좋은 곳이긴 하지." 재주가 늘 문제다. 그런데 그 중간은 어디인가?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