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때 이덕리(李德履·1728~?)는 진도의 유배지에서 '상두지(桑土志)'를 지었다. 상두(桑土)는 뽕나무 뿌리다. '시경' 빈풍(豳風) '치효(鴟鴞)'편에 "하늘이 장맛비를 내리지 않았을 때, 저 뽕나무 뿌리를 가져다가, 출입구를 얽어두었더라면, 지금 너 같은 낮은 백성이 감히 나를 업신여겼겠는가.(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片扁戶, 今女下民 或敢侮予)"라 한 데서 나왔다. 뽕나무 뿌리는 습기를 막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의 뜻으로 쓴다.
이덕리는 '상두지'에서 호남과 영남 지역에 자생하는 차를 국가에서 전매하여 중국 국경에 내다 팔아, 여기서 생기는 막대한 이익으로 국방 시스템을 개선할 획기적이고도 구체적인 방안을 제안했다. 아무도 차의 효용가치를 거들떠보지 않았을 때였다. 밑천을 따로 들일 것도 없이 노는 노동력을 이용해 엄청난 국부를 창출할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그의 제안은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잊혔다. 다산이 '경세유표'와 '대동수경(大東水經)'에서 한 차례씩, 초의(艸衣)가 '동다송(東茶頌)'에서 그의 '동다기(東茶記)' 한 구절을 인용했을 뿐이다.
'시경' '치효'편의 앞뒤 내용은 이렇다. 둥지 속의 새끼를 올빼미가 와서 잡아먹었다. 장맛비가 오기 전에 뽕나무 뿌리로 출입구를 막아 단속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올빼미를 원망하기보다, 미연에 대비하지 못한 자신을 더 자책했다. 부실한 둥지는 비가 줄줄 새고, 배고픈 올빼미에게 자식마저 내주었다. 뒤늦게 애가 달아 날개깃이 모지라지고, 꼬리가 닳아 빠지도록 애를 써도 둥지는 비바람에 흔들흔들 위태롭다. 일이 벌어진 뒤에 전날의 게으름과 부주의를 뉘우쳐도 때는 이미 늦었다. 소 다 잃고 외양간은 고쳐 무엇 하겠는가?
문제는 늘 설마와 괜찮겠지 하는 마음에서 생긴다. 구제역이 처음 발생했을 때,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뒤늦게 부리가 헐도록 띠풀을 모아봐도 비가 줄줄 새는 둥지는 손볼 수가 없다. 대책이 세워지는 것은 늘 상황이 끝난 다음이다. 문제를 알았을 땐 너무 늦었다. 공자께서는 이 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시를 지은 사람은 도리를 아는구나. 능히 나라를 다스리게 한다면 누가 감히 그를 업신여기겠는가?"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