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蛇福)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승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원효를 찾아가 포살계(布薩戒)를 지으라고 요구한다. 원효가 시신 앞에 서서 빌었다. "태어나지 말지니, 죽는 것이 괴롭나니. 죽지 말 것을, 태어남이 괴롭거늘.(莫生兮其死也苦, 莫死兮其生也苦)" 사복이 일갈했다. "말이 너무 많다." 원효가 다시 짧게 고쳤다. "죽고 남이 괴롭구나.(死生苦兮)" 처음엔 14자였는데, 4자만 남겨 할 말을 다 했다.
다음은 '논어' '위령공(衛靈公)'의 한 구절이다. "악사 사면(師冕)이 공자를 뵈러 왔다. 계단에 이르자 공자께서 '계단입니다' 하시고, 자리에 이르자 공자께서 '자리입니다' 하셨다. 모두 앉자 공자께서 '아무개는 여기 있고, 아무개는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셨다."
옛날 궁정의 악사는 장님이었다. 앞이 안 보이는 그가 찾아오자 공자께서 친히 나가 맞이하는 장면이다. 원문으로 27자밖에 안 되는 짧은 글인데, 시각 장애인을 배려하는 공자의 자상함과 그 자리의 광경이 눈에 선하다.
홍석주(洪奭周·1774~1842)는 '학강산필(鶴岡散筆)'에서 그 문장의 간결하고 근엄함에 감탄했다. 그는 '모두 앉았다'고 한 표현에 주목했다. 공자와 다른 사람들이 앉아 얘기하는 중에 사면이 왔다. 그런데도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앉았다'고 한 것에서 다들 일어선 것을 알 수 있다. 고작 악사 하나가 왔는데 왜 일어났을까? 스승인 공자께서 일어나시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공자께서 일어나신 것은 어찌 아는가? 공자께서는 관복 입은 사람과 맹인을 보면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반드시 일어나셨다는 다른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장면을 우리더러 쓰라고 했다면 서사가 몇 배는 길어졌을 것이다.
당나라의 문장가 한유(韓愈)가 말한 글쓰기의 비법은 이러하다. '풍부하나 한 마디도 남기지 않고, 간략하지만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는다.(豊而不餘一言, 約而不失一辭)' 한 글자만 보태거나 빼도 와르르 무너지는 그런 맵짠 글을 쓰라는 말씀이다. '사간의심(辭簡意深)', 말은 간결해도 담긴 뜻이 깊어야 좋은 글이다. 말의 값어치가 땅에 떨어진 세상이다. 다변(多辯)과 밀어(蜜語)가 난무해도 믿을 말이 없다. 사복이 원효에게 던진 '말이 많다'는 일갈이 자주 떠오른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