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숙록(私淑錄)
다산이 34세 때 우부승지(右副承旨)의 중앙 요직에서 금정찰방(金井察訪)의 한직으로 몇 단계 밀려 좌천되었다. 준비 없이 내려간 걸음이어서 딱히 볼 만한 책 한 권이 없었다. 어느 날 이웃에서 반쪽짜리 '퇴계집(退溪集)' 한 권을 얻었다. 마침 퇴계가 벗들에게 보낸 편지글이 실린 부분이었다.
다산은 매일 새벽 세수한 후 편지 한 통을 아껴 읽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오전 내내 새벽에 읽은 편지 내용을 음미했다. 정오까지 되새기다가 편지에서 만난 가르침에 자신의 생각을 보태서 한 편씩 글을 써 나갔다. 33편을 쓰고 났을 때, 정조는 그를 다시 중앙으로 불러 올렸다. 그 경계와 성찰의 기록에 다산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이란 제목을 붙였다. 남들이 낙담해서 술이나 퍼마실 시간에 그는 선현의 편지 속에서 오롯이 자신과 맞대면했다.
박순(朴淳)에게 보낸 답장에서 퇴계가 말했다. "어찌 바둑 두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한 수를 잘못 두면 온 판을 그르치게 됩니다. 기묘년의 영수(領袖) 조광조(趙光祖)가 도를 배워 완성하기도 전에 갑자기 큰 명성을 얻자, 성급히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자임하였습니다." 이 글을 읽고 다산은 퇴계의 평생 출처가 이 한 문단에 다 들어있다고 적었다. 당시와 같은 성대에도 앞선 실패를 거울삼아 이렇듯이 경계한 것을 보고, 군자의 몸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한 수 배웠다고 했다. 자신의 실패 또한 몸가짐을 삼가지 못한 데서 왔음을 맵게 되돌아본 것이다.
이담(李湛)에게 보낸 답장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이 날 몰라준다고 말하는데, 저 또한 이 같은 탄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남들은 그 포부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탄식하나, 저는 제 공소(空疎)함을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것을 탄식합니다." 허명을 얻은 것이 부끄럽다고 하신 말씀인데, 다산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그만 진땀이 나고 송구스러웠다고 적었다. 이렇게 해서 퇴계의 편지 한 줄 한 줄이 자신을 반성하는 채찍이 되고, 정신을 일깨우는 죽비가 되었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 사람의 본바탕이 드러난다. 좌절의 시간에 그저 주저앉고 마는 사람과 그 시간을 자기 발전의 밑바대로 삼는 사람이 있다. 평소의 공부에서 나온 마음의 힘이 있고 없고가 이 차이를 낳는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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