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골삼천(髁骨三穿)
다산 정약용이 흑산도의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 "여기에도 내왕하는 소년이 몇 있고 배움을 청하는 어린아이도 몇 됩니다. 모두 양미간에 잡털이 무성하고, 온몸에 뒤집어쓴 것은 온통 쇠잔한 기운뿐입니다."
다산은 이런 지리멸렬한 코흘리개들을 가르쳐 중앙 학계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대단한 학자로 성장시켰다. 다산과 그의 제자들은 달리 예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드림팀이었다. 다산의 진정한 위대성은 유배 18년간 이룩한 500권의 저술보다, 그가 제자들의 성격에 맞게 장점을 길러주고 용기를 북돋워 스스로 떨쳐 일어나게 만든 참스승이었다는 점에 있다.
다산의 아들 정학연의 술회에 이런 내용이 보인다. "학업을 청한 자가 수십 인인데, 혹은 7~8년 만에 돌아가고, 혹은 3~4년 만에 물러났다. 과거시험에 힘 쏟은 자도 있고, 시와 고문을 섭렵한 자도 있었다. 막판에는 창을 쥐고 방으로 들어와서 헐뜯고 원망하며 등 돌린 자도 있었다." 마지막 구절이 목에 탁 걸린다. 부려 먹기만 하고, 해준 게 뭐 있느냐며 패악을 떨면서 품을 떠난 제자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다산에게 헌신하면 나중에 귀양에서 풀린 뒤 낮은 벼슬 한자리라도 얻으려니 기대했던 게 틀림없다.
다산은 공부의 방법으로 '초서'를 가르쳤다. 책의 중요 대목을 베껴 써가며 읽는 방식이다. 최근 강진 쪽에서 발굴되는 자료를 보니, 제자마다 방대한 초서를 모은 총서(叢書)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다산이 가장 아꼈던 제자 황상(黃裳)은 나이 70이 넘어서도 여전히 초서를 계속 했다. 사람들이 "그 나이에 초서는 해서 무엇 하느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선생님은 강진에서 20년 유배 생활 동안 복사뼈에 세번 구멍이 나도록 공부하고 또 공부하셨다. 거기에 대면 내 공부는 공부도 아니다." 이른바 '과골삼천(髁骨三穿)'의 고사가 이렇게 생겨났다.
다산의 경이로운 작업 뒤에는 스승의 표양을 보고 고무된 제자들의 몸을 사리지 않는 헌신이 있었다. 어찌 보면 다산은 전체 작업을 진두지휘한 야전사령관이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을 뿐이다. 스승의 날에 나는 과연 어떤 스승이고 제자였나 생각해 본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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