豹菴宅표암댁
嶺松千萬萬(영송천만만) 산마루 소나무는 천 그루 만 그루건만 宅券無南山(택권무남산) 집문서에는 아예 남산이 빠져 있네. 也是世間物(야시세간물) 사는 집이 속된 세상에 속해 있어도 尙餘丘壑閒(상여구학한) 자연의 한가함은 제법 남아 있나니 凉濤灑軒檻(양도쇄헌함) 서늘한 솔바람은 난간에 불어오고 積翠開襟顔(적취개금안) 짙푸른 산빛은 옷깃에 묻어나네. 偶此不論價(우차불론가) 우연히 이런 곳에 값을 매기지 않다니 愁君無價還(수군무가환) 값을 치를 데가 없어 그대 걱정이겠네.
월암(月巖) 이광려(李匡呂·1720~ 1783)가 저명한 화가 표암 강세황의 집을 찾아갔다. 표암은 마침 서울 남산 자락에 집을 새로 사서 차헌(借軒)이란 이름을 붙였다. 값을 치르고 산 집에다 빌린 집이라니? 무엇을 빌렸단 말인가? 집에서 보이는 것은 남산의 빽빽한 소나무 숲, 차헌은 남산의 숲을 통째로 빌리고 있다. 그렇다고 집문서에 남산이 있을 리 없다. 솔바람 소리와 짙푸른 녹음에 둘러싸인 차헌이 그 풍광을 독차지했으니 빌려서 누리는 값을 치러야 하지만 도대체 누구에게 값을 치른단 말인가? 조물주에게 빌린 셈치고는 있지만 나 혼자 누리기에는 미안하다.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조선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