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
.
자케오는
구원에 이르려고 열망하는
부자의 표본이랍니다.
.
자케오의 회개는
예수를 좀 더 가까이서 알고자 하는
열만으로 시작한답니다.
.
또한 그의 회개는
예수를 만나려고 사람들과 합류하고
자기 집에 당신을 받아들일 때 계속된답니다.
.
그리고 그의 회개는
자기 제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속여먹은 것에 대해서는
배로 갚겠다고 결심한 때 완성 된답니다.
.
.
.
교회, 곧 우리 그리스도인이
피상적이고 오만하게
자캐오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벗어나,
‘자캐오의 시각’에서 세상과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한 ‘예수님의 태도’로 자캐오를 만나야 한답니다.
.
.
. ‘자캐오의 시각’이란
사람들에게 밀려나 예수님을
멀찍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시선이며,
돌무화과나무 위에 몸을 숨긴 채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시선이랍니다.
.
자캐오가 큰 부와 세력을 지녔지만
내적으로 황폐하며
공동체에 제대로 속하지 못한 이였듯이,
오늘의 자캐오들인 현대인들도
복잡한 사회 안에서 고립감과
내면의 부자유로 고민하고 번민한답니다.
.
보이지 않는 곳에 움츠리고 있던
‘키 작은’ 자캐오를
사람들 앞에 나서게 한 것은
그를 부르신 예수님의 태도였답니다.
.
예수님께서는 오만한 모습으로
미리 준비된 답을 하지 않으셨답니다.
.
먼저 눈을 맞추시며
그가 용기를 내도록 이름을 불러 주시고
그의 집에서 묵으신 예수님의 태도가,
언제나 문밖을 맴돌던 자캐오를
마침내 진리의 문 안으로 이끌었답니다.
. .
.
“매우 지혜로운 신부님 한 분이 제게 말씀하시길, 지금 우리는 울타리 안의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의 비유와 정반대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하셨습니다. 현재 울타리 안에는 단 한 마리 양이 있을 뿐 아흔아홉 마리 양이 길을 잃었는데 찾아 나서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토마스 할리크 신부)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