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 . .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꾸짖으시면서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 . . 존경받기를 갈망하고 다른 사람의 크고 작은 과오를 들추고 판단하며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모습 때문이랍니다. . 외적 경건함을 추구하지만 사실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자비와 신의가 아니라, 왜곡된 욕망인 질시와 증오와 탐욕으로 차 있는 위선이 그들을 불행하게 만든답니다. . . . 이러한 위선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살펴보면, 이 불행이 그 시대 그들에게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에게도 다가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어리석고 딱하고 불쌍한 삶의 모습은, 인생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한 채 다른 것에 집착하여 허무함을 보상받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랍니다. . 무엇이 참으로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지 깊이 성찰하고 그것을 얻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이 삶의 방식이 되어 버린답니다. . 매서운 눈초리와 차가운 냉대의 분위기와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자아의 모습에서 벗어나 탁 트인 곳으로 나아가 인생의 참의미를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답니다. . 사람들의 지위와 영예가 더 이상 의미 없는 곳,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문이 사라진 곳, 사랑과 존중의 온기가 느껴지는 곳, 참으로 중요한 것이 가려지지 않는 곳에서 바라보아야 한답니다. . 이러한 참된 자유의 공기가 흐르는 곳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그곳에 어떻게 다다를 수 있을까? 그곳에서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을 진지하고 절실하게 던지는 사람은 사실은 그 답이 어디에 있는지도 예감한답니다. . 이러한 질문을 용기 있게 시작한 것이 바로 복음을 만난 순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 나는?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