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705.140703 상처를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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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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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는
공동체의 증거를 믿지 않고
특별한 체험을
요구하는 자들을 상징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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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예수께서는
공동체 안에서
당신을 보여주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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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미래의 모든 세대는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그리스도신자 공동체의 증거를 통하여
부활하여 살아 계시는 예수를 믿게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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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의 모습을 잘 성찰하면서
신앙의 확신과 성숙의 계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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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 진리에 대한 믿음 앞에서 주저하고
입증된 것과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과학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오늘의 신앙인들은
토마스가
그들 자신의 숨은 생각을 대신 말해 준 것처럼
느낄 때가 많기 때문이랍니다.
. 그러나 신학자이자 철학자로서
체코의 종교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유명한
토마스 할리크 신부는 토마스 사도의 불신을
과학주의와 신앙의 대립으로 해석하는 것과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자고 초대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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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무신론자들과의 대화에 노력하고 있는 그는,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이미 죽은 라자로의 집으로 가자고 하셨을 때
토마스는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를 했던 사람임을 기억해야한답니다
(요한 11,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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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그에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이후에 들려온 부활 소식은
‘너무 행복한 결말’처럼 느껴졌을 것이라고
할리크 신부는 생각한답니다.
. 그러기에 토마스의 불신은
세상의
고통과 불의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어떻게 신앙의 문을 열 수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뇌하며 질문하는 모습이기도 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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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상처에 손을 대는 것’만이,
토마스가 사로잡혀 있는
고통의 기억에서 부활의 확신으로,
의심의 태도에서 확신 어린 투신으로
변모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아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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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상처로 남아 있되’
그 안에서 죽음마저도 넘어서는
사랑의 힘을 발견한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라고 고백한답니다.
. 주님의 상처를, 나의 상처를, 형제의 상처를,
그리고 세상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똑바로 바라볼 때
우리는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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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만지며 더듬거리는 손길 속에서,
보지 않고도 주님을 믿는
우리 신앙의 확신은 조금씩 자라날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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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이신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불타는 가시덤불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셨답니다.
하느님의 외 아드님,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그분께서는
십자가의 불타는 고통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셨답니다.
오직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다른 이의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바로 그분의 상처인 세상의 상처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던져진 요구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게 될 것이다.”
(토마스 할리크, ‘상처를 만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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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상처를,
나의 상처를, 형제의 상처를,
그리고 세상의 상처를 바라봐야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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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