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塾中諸友課日次放翁韻
(서당 친구들과 짓다)
判知軒駟已無期
(판지헌사이무기)
고관대작 되려던 꿈은
이제 아예 글렀으니
耕讀營生計未非
(경독영생계미비)
주경야독 생계를 꾸려
사는 것이 옳고말고.
肚慣果蔬嫌烈酒
(두관과소혐열주)
나물에 길들여진 창자라
독한 술은 피하게 되고
躬親畚鍤怕新衣
(궁친분삽파신의)
삼태기에 삽질하는 몸이라
새 옷 입기 거북하네.
風薰猶有披襟爽
(풍훈유유피금상)
훈풍이 불어와도
옷깃을 헤치면 시원하고
雨細纔成灑面霏
(우세재성쇄면비)
이슬비가 뿌려도
얼굴이나 고작 적시네.
坐對佳辰慚俗陋
(좌대가신참속루)
우두커니 좋은 철을 보내려니
비루한 풍속 부끄러워라
傾村採艾日中歸
(경촌채애일중귀)
온 마을 사람들 쑥을 뜯어서
한낮에 돌아오네.
구한말 시인이자 역사가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 43세 되던 해에 지었다. 시골에 묻혀 농사를 지으며 사는 서생 겸 농부 매천 선생! 단오 무렵 날이 좋아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니 시가 절로 나오고 속마저 터놓게 된다. 이제 40을 넘긴 나이라, 세상에 나가 보란 듯 성공하겠다던 허황한 옛 꿈일랑 버려야겠다. 되도 않은 꿈에 매달리느니 생계나 잘 꾸려가야지. 푸성귀에 막걸리 마시고, 삽 들고 흙 묻은 옷이나 입는다. 바람 불면 옷을 벗고 비 뿌리면 얼굴에 맞는다. 천생 농사꾼 처지다. 단오라고 쑥개떡 해먹으려는지 온 마을 사람들 쑥을 뜯어 돌아온다. 왠지 모르게 어설픈 그 풍경은 마음 한편에 아직도 남아 있는 헛된 꿈 탓일까?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조선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