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불빛
압정 같은 시간의 켜 연꽃으로 피워내며
막새기와 징검다리 품어 안고 건넜다
돌아서 되새겨 보면 탱자꽃빛 은은한데
누군가는 가야만 할 피할 수 없는 길 위에서
지고 피는 패랭이처럼 하늘을 이고 서서
추녀 끝 울리던 풍경 그 소리에도 마음 기댔다.
아흔일곱 질긴 명줄 놓으시던 시할머니
담 넘는 칼바람에도 꼿꼿하던 관절 새로
한 생애 붉디붉은 손금 배롱꽃잎 흩날리고
어느 새 종가가 되어져 있는 나를 보며
대를 이어 밝혀주는 화롯불씨 환히 지펴
마음을 따뜻이 데우는 등불을 내다 건다
/하순희
종가의 불빛이 생각나는 때다. 설을 앞둔 음력 섣달에는 특히 그렇다. 가문의 자긍 지키기라는 운명의 짐을 진 사람들. 그중에도 종갓집 맏며느리의 임무는 지엄하기 짝이 없다. 그런 때문일까, 뉘 가문의 고택을 지날 때면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말소리며 걸음도 조심스러워진다.
지금도 어느 종가에서는 설맞이 불빛이 오래 밝겠다. 그 가문만의 특별한 제수며 설음식 준비로 주변조차 환히 밝히리라. 그렇듯 섣달 칼바람 눈보라 속에서도 따뜻이 퍼지는 종가의 불빛으로 삶은 또 이어진다. 그 등을 내다 거는, 마를 새 없지만 위엄 어린 손등이 보이는 것만 같다.
/정수자 :시조시인/그리ㅁ:유재일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