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7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이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시찰하고 있다. 반공포로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 1953년 6월 중순 이승만은 바로 이 포로들을 포함한 27000여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공공부문
강대국 틈에 끼인 약소국의 생존전략
세계열강의 전쟁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는 약소국의 비결은 무엇인가? 1959년 시카고 대학 출판사에서 펴낸 폭스(Annette Baker Fox, 1912-2011) 교수의 <<약소국의 힘: 2차대전 중의 외교(The Power of Small States: Diplomacy in World War II)>>은 슬기로운 외교 전략으로 국체를 보전한 터키,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스페인 등의 사례를 분석했다. 이 모든 나라들은 2차 대전의 화마 속에서도 강대국에 병합되지 않고서 오히려 더 강성한 국가로 거듭났다.
세계 외교사에는 군사적 열세에 처한 약소국이 강대국을 압박하여 큰 양보를 받아내는 외교술을 발휘한 사례가 적지 않다. 약소국 지도자가 다양한 전술과 기상천외한 술수를 써서 강대국 실권자들을 절절매게 가지고 노는 흥미로운 장면도 종종 보인다. 북한의 기습 침략으로 절멸의 위기까지 내몰렸던 대한민국의 국체를 지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이승만의 외교 노선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에 비하면 1990년대 이후 북한의 벼랑끝전술은 전체 인민을 볼모로 잡은 전체주의 세습왕조의 권력 유지책으로 인류 외교사의 하지하책(下之下策)일 뿐이다.
한국전쟁 중 이승만 정권과 미국 정부의 대립은 1951년 정전 협상이 개시될 때부터 1953년 7월 말 마침내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시간이 갈수록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정계를 뒤흔드는 더 강경한 외교 전술을 구사했다. 마침내 1953년 6월 반공포로 전격 석방이라는 이승만의 기습 작전에 한 방 얻어맞은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억류하여 권력을 교체하는 “에버레디(Ever-ready)” 작전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이에 질세라 이승만은 더 당당하게 미국을 압박했고, 그 결과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수세에 몰려 대규모 경제원조, 지속적 군사 지원, 상호방위조약을 약속하는 외교사의 역설이 일어났다. 미국을 쥐고 흔든 이승만의 외교력에 대해 미국의 한 연구자는 장기판 “졸(卒, pawn)”가 “차(車, rook)”처럼 활약한 사례라고 평가했다(Barton J. Bernstein, “Syngman Rhee: The Pawn as Rook,” 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 10:1, 38-48).
“반공포로석방,” 무엇을 위한 포석이었나?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Mark W. Clark, 1896-1984) 장군은 17일에 걸친 마라톤 군사 회담 끝에 중국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와 북한 김일성(1912-1994)을 상대로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한국 측 대표는 그 자리에 없었다.
항간엔 지금도 유엔군에 작전 지휘권을 넘긴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이 휴전의 당사자도 될 수 없었다는 낭설이 떠돈다. 뜬소문에 현혹당한 한 유명 철학자는 2019년 공영방송에 나와선 이승만을 미국의 꼭두각시로 매도하는 역사적 몰상식을 드러냈다. 대체로 이러한 발상은 당시 상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추측이거나 조선노동당과 북한에 동조하는 남한 좌익 세력의 흑색선전일 뿐이다.
유엔 측 대표 해리슨 중장(왼쪽 테이블 착석)과 북한 대표 남일 대장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공공부문
이승만은 휴전 협상을 거부했다. 당시 이승만의 입장은 줄기차게 “통일 없인 휴전 없다,” “중공군 철수 이전엔 휴전 없다”였다. 이승만은 휴전회담 한국 측 대표를 소환하고 “단독 북진”의 주장을 이어갔다. 완강하게 정전에 반대하며 중국군의 전면 철수와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던 이승만은 당연히 자의에 따라 휴전회담에 불참할 뜻을 분명히 밝혔다. 5월 25일 유엔사령부의 결정문은 이승만이 강력히 요구했던 “휴전 직후에 곧 반공포로를 석방한다”는 약속을 빠뜨렸으며, 대신 인도군이 중국군과 함께 포로들을 관리하고 문책한다는 조항을 포함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한국 측은 협상 테이블에 못 낀 게 아니라 협상을 거부하고 안 나갔다.
휴전협정 39일 전인 6월 18일 이승만은 전국 9개 전쟁포로 수용소에 억류돼 있던 2만5000여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벼랑 끝 조치를 감행했다. 그 소식 전 세계로 타전되자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격노했고, 처칠 수상은 면도 중 놀라서 얼굴을 베었다고 전해진다. 서방세계의 반응을 익히 예측했던 이승만은 눈도 깜작이지 않은 듯하다. 그 후 며칠에 걸쳐 그는 2천여 명의 반공포로를 더 석방하는 초강수를 이어갔다. 6월 19일 새벽 도쿄 주재 미국 언론사 특파원들이 전한 포로 탈출 현장의 긴박한 상황은 읽는 이의 머리털이 주뼛 서게 한다.
“저항하는 남한이 어제 임박한 협정(truce)에 닥칠 위협 따윈 생각지도 않는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2만5000명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오늘 이른 새벽 서울 부근 항구도시 인천의 수용소에서 1500명 반공포로 대규모 탈출을 시도했고, 미국 병사들 및 해병대 병력과 충돌했다. 최초의 비공식 보고에 따르면, 포로 1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10명 사망, 93명 중경상). 이 수용소는 포로 탈출이 일어난 다섯째 캠프였다.” (The Evening Star, 1953. 6. 18. 도쿄와 워싱턴 사이 시차로 미국 동부 시간으로 18일에 보도됨.)
전쟁 중 반공포로 수용소를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수행원들을 포로들이 태극기를 들고서 열렬히 환영하는 장면. /공공부문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대규모 반공포로들을 향해 미군 병력이 급기야 발포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승만이 입을 열었다. 그는 “유엔사령부와는 충분히 협의하지 않고서”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대한민국 정부 대변인은 우리가 그들(중국과 북한)의 계획을 수포로 돌렸다”고 공식적으로 발언했으며, 라디오 방송으로 대한민국 국민을 향해서 “석방된 반공포로들을 도와주라” 촉구했다.
당시 중국과 북한은 반공포로 문제를 협정의 중대 이슈로 삼고 있었다. 휴전협정이 임박한 상황에서 이승만이 단독으로 감행한 반공포로 석방은 미국의 협상 노력을 수포로 돌리는 “유엔에 대항한 공개적 저항(open revolt against U.N.)”이나 “진짜 사보타주(real sabotage)”라 보기에 충분했다.
이승만은 대체 어떤 힘을 믿었나?
그해 6월 초 미국은 백선엽 등 대한민국 육·해공군의 실세를 미국으로 초빙하여 이승만을 압박하는 방법도 모색했었다. 미국의 의도가 먹힐 새도 없이 그들은 오히려 이승만의 입장에서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필요성만 역설했다. 6월 5일 이승만은 공산 세력의 요구를 수용하는 미국에 항의하면서 단독자결권 행사를 천명하고는 이틀 후 방미 중인 장성들에게는 즉각 소환을, 도미 예정이었던 장성들에게는 출발 중지를 명령했다. 11일 후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수로 이승만은 정전협정으로 지리멸렬한 교전 상황을 서둘러 끝내려 했던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위기에 빠뜨렸다. 미국 정부는 이후 한 달 이상 지체된 휴전협정을 다시 이어가야 했다.
반공포로 석방의 초강수를 두고 나서 미국 정계는 일면 이승만에 등을 돌리는 분위기를 보였다. 6월 19일 워싱턴포스트지 사설(社說)은 “이승만, 세계를 괴롭히다(Rhee spites the world)”라는 제명 아래 이승만의 도발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한국의 정전협정을 고의로 망치려는 이승만의 담대한 시도는 상상을 넘어선다. 이 완고한 늙은이는 수백만의 희망을 짓뭉갠 막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전체 구조를 깨부수겠다는 그의 태도는 ‘내가 간 다음에 홍수(après moi le deluge)’라는 선언이다. 2만5000명을 성공적으로 석방한 이승만 박사의 음모보다 더 놀라운 점은 유엔사령부, 특히 미국이 이승만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뒀다는 점이다(The Washington Post, 1953. 6.19.).”
이 사설은 미국 정부가 이승만의 도발을 사실상 묵인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나아가 미국의 정부 임원들이 사전의 이승만의 계획을 몰랐었기를 희망하지만, 정황상 미국의 공모한 혐의를 배제할 수 없다며 국정 조사를 요구했다. 사설은 근본 문제가 미국 정책에 있다며, 장개석과 마찬가지로 이승만은 “더 완강하게 저항할수록 더 큰 존중을 받는” 역설을 배웠다며 미국의 유순한 아시아 정책을 비난했다. 신경질적인 어조로 “더 좋은 자가 없어서 작은 독재자(petty tyrant)를 지원한 미국의 죄과”라고 이승만에 휘둘리는 미국 정부를 비판했다. 이승만 때문에 휴전협정이 결렬되어 또 다시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미국 젊은이들이 죽어갈 판이니 미국 언론인들이 분노할 만도 했다.
1953년 6월 19일 워싱턴 포스트 사설 “이승만, 세상을 괴롭히다(Rhee Spites the World”(왼쪽 첫째). /The Washington Post
신기하게도 이승만은 향후 1년에 걸쳐서 그토록 강경하게 돌아선 미국 언론의 논조를 슬그머니 자기편으로 되돌리는 외교적 마력을 발휘한다. 그 이듬해 7월 28일 이승만은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는 특전을, 8월 2일에는 뉴욕 맨해튼 마천루가 즐비한 “영웅의 협곡(Canyon of Heroes)”에서 장엄한 오픈카 행진의 영광을 누렸다. 과연 그는 어떻게 불과 한 해전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비난의 화살을 열렬한 환영의 색종이로 뒤바꿀 수 있었을까?
당시 미국 정부의 관련 문서를 분석해 보면, 이승만의 극적인 “도발”을 미국 정가 주요 인물들은 어느 정도 예측했으며, 특히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클라크 장군은 모르는 척 눈감고 슬그머니 도와준 혐의가 있다. 1953년 5월 25일 클라크 장국은 다음과 같이 합참 본부에 쓴 보고문에서 남한 9개 수용소는 한국군이 실질적으로 관할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지금 [수용소 경비를 담당하는] 한국군을 미군 병력으로 대체한다면 민감한 상황을 오히려 더 악화시킬 것입니다. 만약 미군이 오직 공산 지배를 벗어나려 저항하는 한국인들을 저지하는 강력한 작전을 맡게 된다면 매우 불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William Stueck, The Korean War: An International Histo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8], 333).
클라크의 이 발언은 당시 미국의 군부가 반공포로석방을 강력하게 막을 의지도, 명분도 없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제로 클라크는 미군 병력이 반공포로의 탈출을 막기 위해서 발포하게 되면 이후 한미 양국 사이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크게 우려했다. 그는 반공포로가 탈출을 시도할 때 발상할 수 있는 대량 학살의 우려를 사전에 인지하고, 수용소에 배치된 미군 병력을 향해 기관총·소총 등의 사용을 금지하고 오직 시위 진압 전술만 사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물론 클라크에게도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클라크 장군이 고의적인 미온적 대처로 반공포로의 탈출을 묵인한 정황을 부인할 수 없다(Grace Chae, “”Complacency or Complicity?: Reconsidering the un Command’s Role in Syngman Rhee’s Release of North Korean pows,” The Journal of American-East Asian Relations, Vol. 24.2/3 [2017]: 128-159).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이 막가파식 도발이 아니라 유엔군 사령부의 입장, 미국 정가의 분위기,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정책, 아울러 한국군의 객관적 전력까지 다 따져 본 후 성공 가능성을 확신하고서 감행한 정밀한 작전이었음을 보여준다. 약소국 대한민국의 지도자 이승만에게 대체 무엇이 있었는가?
첫째, 이승만은 전쟁 중 유엔군의 명령을 듣는 대한민국 군부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발휘했다. 둘째, 그는 3년간 함께 공산 세력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유엔군 사령관의 암묵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셋째, 공산주의 세력에 완강하게 맞서는 이승만의 진정한 투혼은 미국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미국 의회에서 최소 여섯 명 이상의 의원들이 공개적으로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을 지지했다.
유력지 <<이브닝 스타(Evening Star)>>의 일요판 매거진 <<선데이 스타>> 1953년 8월 16일 1면(왼쪽)과 7면(오른쪽). 왼쪽 잡지 표지 아래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7면에 게재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사: 이승만의 ”왜 나는 홀로 섰는가“를 소개하고 있다.
1953년 8월 16일 당시 미국의 유력 석간지였던 워싱턴 “이브닝 스타(The Evening Star)”는 일요판 잡지 “선데이 스타(The Sunday Star)”에 이승만의 장문이 실렸다. 일요판 제1면 표지 맨 밑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사(an article of historic significance)”이란 설명과 함께 이승만의 “나는 왜 홀로 섰나?(Why I stood alone)”이 소개되었다. 이승만의 기고문은 7면 전면을 장식하고, 21면과 22면의 상단으로 이어진다. 편집인은 다음 문구로 이승만을 소개한다.
“훗날 역사는 이승만에 대해 무슨 말을 할까? 많은 이에게 그는 한국의 평화를 지연한 완고한 사내이다. 다른 이들에게 그는 공산주의 세력에게 뮌헨 협정 같은 유화책을 쓰는 것에 반대했던 고독하고도 영웅적인 인물이다. 이번 주 잡지에선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 박사의 개인적 성명문을 특별히 독점적으로 게재한다. 당신의 평가가 어떠하든, 그가 이 글을 쓴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든, 지금도 진행 중인 우리 시대 역사의 일부로서 이 글을 읽고 싶어 할 것이다.”
이승만은 장문의 서두를 “반역적”이란 비난을 감수하며 아시아에서 공산 세력의 침략에 강력하게 맞선 자신의 투쟁이 1940년 나치 세력에 맞서 고독하게 싸운 윈스턴 처칠의 투쟁만큼이나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라는 당당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벼랑 끝 이승만의 비밀병기는 자유 투사(freedom fighter)의 도덕적 정당성이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한국 현대사 최고 명문 중 한 편이 아닐까. 다음 회에 이 글을 상세히 분석할 예정이다. <계속>
1949년 8월 6~9일 한국의 진해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장제스 총통이 만나 극동의 반공 태세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태평양 동맹의 제1보를 내딛었다. /공공부문
오피니언 칼럼
벼랑 끝 이승만, 최강국을 움직인 약소국의 비밀병기는?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입력2024.02.17. 02:00업데이트2024.02.17. 06:29
157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21회>
이승만 2
1962년 하와이에서 병상의 이승만 곁을 지키고 있는 프란체스카. 1960년 4월 하야한 이승만은 같은 해 5월 하와이로 간 뒤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눈을 감았다.낸 것이다.”
ADVERTISEMENT
4·19 주역 중 한 사람인 이영일 전 국회의원은 오히려 ‘건국전쟁’이 놓친 부분을 지적했다. 조병옥의 사망으로 대통령에 무투표로 당선된 이승만이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하야하는 대목에 관한 설명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국민이 물러나라고 해서 물러나는 지도자는 세계 정치사에서도 찾기 힘들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북한의 대남 전략에 우리 정부가 휘둘리면서 이승만 혐오를 방치했다.” 범민련 사무총장을 지낸 민경우는 주사파가 성공시킨 최대 프로젝트가 ‘이승만 죽이기’라고 고백한 바 있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는 판타지가 강고히 작동하는 사회, 민중을 역사의 까막눈으로 만들려는 삼류 다큐가 판을 치는 한국 사회에 절실한 건 객관적 사실이다. 그레그 브레진스키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1950년대를 증언할 수준 높은 자료들이 한국엔 턱없이 부족하다. 더 많은 역사적 자료를 찾아내 거짓과 진실을 바로잡는 것이 시급하다”고 했다. 김덕영 감독도 “객관적 사실, 날것으로만 이승만 다큐를 만들기 위해 문서, 사진, 영상, 증언들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다”고 했다. 그의 진심은 적중했다. 70년간 은폐돼온 이승만의 공(功)을 증언하는 사료들을 발굴, 표현의 자유란 명분으로 현대사를 멋대로 왜곡해온 좌편향 영상물들에 경종을 울리며 국민을 사로잡았다.
1920년 이승만의 중국 밀항을 도왔던 절친 보스윅이 이승만 영결식에 남긴 절규는 그래서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든다.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Why I Stood Alone?’은 휴전협정을 서두르는 아이젠하워 정부에 맞서 홀로 분투하던 이승만이 1953년 8월 미국 유력지에 기고한 글의 제목이다. 70년 뒤 그는 똑같은 질문을 대한민국에 던진다. ‘왜 나는 여전히 홀로 서 있는가?’ 이제 국민이 답할 차례다.
미국 유력지 '이브닝 스타'의 일요판(1953년 8월16일자)에 실린 이승만 대통령의 기고문 'Why I Stood Alone?‘
이승만 3
[김순덕의 도발] 이승만, 러시아-공산 전체주의 본질 꿰뚫은 위대한 정치가
김순덕 칼럼니스트
입력 2024-02-23 14:00업데이트 2024-02-23 14:00
글자크기 설정 레이어 열기뉴스듣기 프린트
설 연휴 온 식구가 ‘건국전쟁’을 봤다. 극장이 만원이어서 뿔뿔이 떨어져 앉아야 했다. 덕분에 각자 눈치보지 않고 영화에 빠져들 수 있었다. 기자인 나는 습관처럼 메모를 했고 젊은 내 딸은 눈물 훔치는 옆 사람을 구경했다고 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자 관객들이 일어나 나오면서 박수를 쳤다. 이쯤 되면 기립박수다.다큐멘터리와 일반 영화의 차이는 팩트냐 아니냐다. 기사는 사실을 쓰고 소설은 아니다(칼럼은 의견을 쓴다^^). 이승만 칼럼을 쓸 때마다 달리는 댓글이 주로 ‘이승만은 6·25전쟁이 터지자 한강다리를 끊고 도망간 나쁜 대통령’이라는 것이었다. 수많은 피난민을 한강에 빠져 죽게 만들고는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켜주십시오” 국민 속이는 방송까지 했다는 건데 김덕영 감독은 그게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그래서 고맙다. 이제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을 한껏 존경해도 되는 것이다.
영화 건국전쟁 포스터.
●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켰지만 과오도어렵게 세운 대한민국을 지켜낸 뒤, 사사오입 개헌에 이어 4·19에 이르는 과정까지 이승만을 존경하기는 그러나 쉽지 않다. 한 인간을 단편적으로 평가해선 안 될 일이지만, 또 지금껏 이승만을 지나치게 박절하게 대한 점은 반성하고 시정해야하지만, 그럼에도 무조건 우상화하는 것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더 많은 뉴스와 혜택을 만나보세요.간편 로그인하고 이어보기
EIU가 발표한 ‘2023년 민주주의 지수’ 국가별 현황. 이코노미스트민주주의 맹주국이어야 할 미국도 완전치 못하다(결함민주). 한때 우리처럼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었으나 탁월한 지배세력 덕에 우리보다 훨씬 잘살고 있는 싱가포르도 결함민주다(그게 더 나을까?). 세계 인구의 3분의 1정도만 러시아를 비난하거나 서방에 동조하는 국가에 살고 있지, 나머지는 중립 아니면 심지어 러시아를 지지하는 나라에 산다. 옛날부터 만만한 나라는 침략하고, 비판자는 죽이고, 권력자는 부패한 무서운 나라인데도.남의 나라 한탄할 때가 아니다. 북한은 권위주의 체제라는 말도 아깝고 안타깝다. 165등. 꼴찌에서 세 번째다. 우리에게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전체주의 독재국가 북조선처럼 됐을 공산이 무섭게 크다(‘눈 떠보니 북한’이라고 상상해보셔요. 얼마나 끔찍한지). 그것만으로도 위대한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추앙할 이유는 충분하다.김순덕 칼럼니스트 dobal@donga.com
• 좋아요 이미지좋아요141
[김윤덕 칼럼] 국민을 역사의 까막눈으로 만든 ‘백년전쟁’의 침묵
‘건국전쟁’ 100만 관객 육박하는데 침묵하는 민족문제연구소김구의 이중성 지적에도 조용4·19세대, “이승만 그대로 담아냈기 때문”‘난 왜 여전히 홀로 서있나’ 묻는 이승만에게 국민이 답할 차례
김윤덕 기자
입력2024.02.21. 03:10
67
이승만 4
설 연휴 온 식구가 ‘건국전쟁’을 봤다. 극장이 만원이어서 뿔뿔이 떨어져 앉아야 했다. 덕분에 각자 눈치보지 않고 영화에 빠져들 수 있었다. 기자인 나는 습관처럼 메모를 했고 젊은 내 딸은 눈물 훔치는 옆 사람을 구경했다고 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자 관객들이 일어나 나오면서 박수를 쳤다. 이쯤 되면 기립박수다.다큐멘터리와 일반 영화의 차이는 팩트냐 아니냐다. 기사는 사실을 쓰고 소설은 아니다(칼럼은 의견을 쓴다^^). 이승만 칼럼을 쓸 때마다 달리는 댓글이 주로 ‘이승만은 6·25전쟁이 터지자 한강다리를 끊고 도망간 나쁜 대통령’이라는 것이었다. 수많은 피난민을 한강에 빠져 죽게 만들고는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켜주십시오” 국민 속이는 방송까지 했다는 건데 김덕영 감독은 그게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그래서 고맙다. 이제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을 한껏 존경해도 되는 것이다.
영화 건국전쟁 포스터.
●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켰지만 과오도어렵게 세운 대한민국을 지켜낸 뒤, 사사오입 개헌에 이어 4·19에 이르는 과정까지 이승만을 존경하기는 그러나 쉽지 않다. 한 인간을 단편적으로 평가해선 안 될 일이지만, 또 지금껏 이승만을 지나치게 박절하게 대한 점은 반성하고 시정해야하지만, 그럼에도 무조건 우상화하는 것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1950년대 주한 미국인들 사이의 공통된 화제는 80세의 이승만이, 특히 경제문제에 있어서, 얼마나 요상하고 멍청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었다…미국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무상원조를 받아내어…헤아릴 수 없는 부정부패 사건들이 줄지어 일어났다.’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가 불편하고 악의적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경무대 시절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 대통령의 생일을 맞아 케이크를 자르는 모습. 동아일보DB김영명 한림대 명예교수 역시 이승만 정권의 기본구조를 ‘일인체제 또는 가부장적 권위주의’로 규정했다(2006년 ‘한국의 정치변동’). 아무도 자유민주주의를 경험해본 적 없는 나라에서 이승만은 대통령 자신이 ‘정파를 초월한’ 위치에 서는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했다. 팔순 고령의 대통령 옆에는 파파의 건강만 챙기는 영부인이 장막을 쳤다. 그 사이를 아첨꾼과 거짓 정보 전달꾼만 파고들었다는 사실은 섬뜩하다. 우리 안에 사라지지 않는 ‘한국적 민주주의’ 원조를 보는 듯해서다. “장기집권은 했지만 독재는 아니”라는 다큐멘터리 속 나레이션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다.
● 이승만이 통찰한 러시아의 침략본능 그럼에도 지금 이승만을 다시 보는 이유는 그가 러시아, 그리고 공산전체주의의 본질을 누구보다 앞서 꿰뚫어본 위대한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윈스턴 처칠이 ‘철의 장막’을 말한 것이 1946년이었다. 이승만은 1904년 29세 나이에 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에서 러시아 전제정치의 본질을 알렸다. 꼭 120년 전이다. 러일전쟁이 터진 1904년 2월부터 넉 달 간 쓴 이 책에서 그는 ‘옛날부터 아라사 사람들의 정치적 목표는 오로지 남의 땅 빼앗는 것’이고 ‘전제정치로 강국이 된 나라’라고 갈파했다.
영국 스웨덴 심지어 일본도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근대국민국가의 시대였다. 러시아는 제 국민을 노예로 아는 전제군주국임을 자부하면서 고종에게 따라하라고 권했다는 걸 젊은 이승만이 알고 있다는 게 되레 놀랍다. ‘전제(專制)나 압제(壓制)나 위에서 하시기에 달려 있는데 어찌 백성이 감히 상관하겠는가…아라사는 전제정치로써 천하의 강국이 되어 만국이 다 두려워하는 바이니 우리를 단단히 의지하면 일본이 감히 어찌할 수 없을 테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노라고 하였다’(현재 아라사-소련-러시아를 따라가는 나라가 북조선 김씨 왕조 아닌가! ).
이승만은 전제정치의 원류로 대(大) 피득(표트르 대제·재위 1682~1725)도 소개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역사적 멘토로 삼는 인물이다. 그가 남긴 14조목의 비밀유서엔 약소국가를 뺏어오는 비법이 담겨 있다. 강한 나라와 먼저 힘을 합해 작은 나라를 나누어 없애고 그 후에는 틈을 타서 그 나라를 마저 쳐 없애며, 자유하는 나라에는 혼인이나 결연을 통해 먼저 내정을 간섭하여 권리를 주장하라는 거다.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2차 세계대전 뒤 어떻게 동유럽을 유린했는지, 한반도 북쪽에 얼마나 서둘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웠는지 돌아보라. 푸틴이 일으킨 2차 대전 이후 유럽 최대의 전쟁 우크라이나 침공사태도 마찬가지다. 뼛속 깊이 박힌 아라사의 영토 야심, 전제정치 DNA는 소련공산당이 무너졌음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거다.
● “공산주의 따르는 정치는 반드시 실패”
1917년 소련공산당 정부가 들어서자 이승만의 반러감정은 반공사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원래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거역해가며 국민을 지배하려는 사상체계’로 간주했고 공산주의 이념을 따르는 정치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장담했다(홍용표 2007년 논문 ‘현실주의 시각에서 본 이승만의 반공노선’). 임정 국무총리 이동휘가 소련과 연대할 것을 주장할 때도 이승만은 “소련과의 협력은 조국을 공산주의 국가의 노예로 만들자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논리로 반대했다.
크게보기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이승만 박사(대통령 취임 전)가 중국 충칭에서 귀국한 김구(가운데)와 존 리드 하지 재조선 미 육군사령부 군정사령관과 함께 한반도 문제를 놓고 대담하기 전 기념사진을 촬영한 모습. 하지만 세 사람은 의견 일치를 보지 못 했다. 동아일보DB
이승만이 1941년 일본의 미국 침략 야욕을 폭로한 ‘Japan Inside Out’에서 소련 공산주의를 독일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 일본 군국주의와 나란히 전체주의로 분류한 것은 중요하고도 의미 있다. 그때만 해도 세계는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었고 소련은 자기네 실상을 감추고 있던 시기여서다.이승만은 ‘민주주의 대(對) 전체주의’ 장에서 ‘소련, 일본, 나치스, 파시스트 세력들은 자기들 정부와 같은 새 정부를 설립하기 위해 미국 정부를 전복시키겠다는 의도를 선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썼다. 그리고 ‘한국의 운명은 세계의 자유민들의 운명과 분리될 수 없다’며 미국의 맹성을 촉구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 초부터 강조했던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을 연상시킨다. 이승만은 그만큼 세상을 앞서간 인물이었다.
● 푸틴까지 이어지는 표트르대제-스탈린 유산답답하게도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소련을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다. 연합국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문제는 러시아”라며 가슴을 쳤지만 루스벨트는 마지막 순간까지 스탈린이 합리적인 인간이라고 믿고 모든 것을 주면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박지향 2023년 저서 ‘윈스턴 처칠, 운명과 함께 걷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300통 이상의 메시지를 분석한 ‘MY Dear Mr. Stalin‘이라는 책도 있을 정도다. 징그럽지 않은가. 또 미국 대통령이 될까 겁나는 트럼프가 과거 북한 김정은에게 보냈던 러브레터처럼.
‘
목적을 위해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산주의의 본질을 꿰뚫어 봤기에 이승만은 미국이 요구한 좌우합작 정부 수립을 단호히 거부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사람이면 다 똑같은 줄 알고 미국은 동유럽에, 중국과 우리에게 좌우합작을 한사코 권했던 것이었다. 미국과 소련 원하는대로 좌우합작에 나섰다가는, 폴란드처럼 망명정부는 배제되고 민주 지도자들은 추방되거나 처형되고 결국 친소 괴뢰정권이 들어설 게 뻔했다. 백범 김구는 몰랐고 이승만은 꿰뚫어 봤던 점이 바로 이것이 아니던가.
소련 공산주의가 망하고도 공산전체주의 속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알렉세이 나발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이 17일 교도소에서 복역 중 급사했다. 47세. 푸틴 독재에 용맹하게, 또 유머러스하게 항거해온 나발니는 러시아 자유의 상징이었다. 푸틴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용병기업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작년 8월 돌연 비행기 사고를 당한데 이어 나발니까지 목숨을 뺏긴 거다. 1940년 지구 반대편 멕시코까지 자객을 보내 정적 레온 트로츠키를 살해했던 스탈린처럼, 푸틴이 멘토로 모시는 대피득처럼, 푸틴도 전제정-공산전체주의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형국이다. 어쩌면 푸틴 이후 또 다른 지배자까지도.
크게보기블리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연설하는 모습. 동아일보DB
●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아니었다면…다행히도 우리는 ‘한국적 민주주의’ 망령에서 벗어났다. 우리끼리는 “이게 나라냐” 또 “이건 나라냐” 불만을 터뜨려도, 야당이 ‘검찰독재’라고 목청을 높여도, 대한민국은 세계인구의 7.8%만 경험하는 ‘완전한 민주주의’ 속에 사는 나라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산하기관 EIU가 15일 발표한 ‘2023년 민주주의 지수’ 보고서에 나온다. 167개국을 완전한 민주주의(8점 이상), 결함이 있는 민주주의(6점 이상), 혼합 체제(4점 이상), 권위주의 체제(4점 이하)로 분류했는데 한국은 22등이지만 아시아에선 5개국 밖에 없는 완전민주다(뉴질랜드, 대만, 호주, 일본, 다음이 우리^^).
EIU가 발표한 ‘2023년 민주주의 지수’ 국가별 현황.
이코노미스트민주주의 맹주국이어야 할 미국도 완전치 못하다(결함민주). 한때 우리처럼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었으나 탁월한 지배세력 덕에 우리보다 훨씬 잘살고 있는 싱가포르도 결함민주다(그게 더 나을까?). 세계 인구의 3분의 1정도만 러시아를 비난하거나 서방에 동조하는 국가에 살고 있지, 나머지는 중립 아니면 심지어 러시아를 지지하는 나라에 산다. 옛날부터 만만한 나라는 침략하고, 비판자는 죽이고, 권력자는 부패한 무서운 나라인데도.
남의 나라 한탄할 때가 아니다. 북한은 권위주의 체제라는 말도 아깝고 안타깝다. 165등. 꼴찌에서 세 번째다. 우리에게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전체주의 독재국가 북조선처럼 됐을 공산이 무섭게 크다(‘눈 떠보니 북한’이라고 상상해보셔요. 얼마나 끔찍한지). 그것만으로도 위대한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추앙할 이유는 충분하다.
• 슬퍼요 이미지
[김순덕의 도발] 이승만, 러시아-공산 전체주의 본질 꿰뚫은 위대한 정치가
김순덕 칼럼니스트
입력 2024-02-23 14:00업데이트 2024-02-23 14:00
글자크기 설정 레이어 열기뉴스듣기 프린트
김순덕 칼럼니스트 dobal@donga.com
/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