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철교 개통 시승식 참석한 이승만 - 1952년 7월 22일 한강철교를 개통한 후 기차에 시승해 한강을 건너는 이승만(앞줄 가운데). 한강철교는 6·25 전쟁 직후 폭파됐다가 복구됐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경제 발전을 위해 '산업부흥 5개년 계획'을 세웠지만 6·25 전쟁으로 무산됐다. 그는 전후에도 경제개발 계획을 만들어 산업화 정책을 밀고 나가 비료 공장, 시멘트 공장 등 기반 시설들을 건설했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국제 통상 장려”라는 대한민주당의 정책은 이승만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사회주의를 따르는 명령 경제 체제에선 국제 교역이 들어설 자리가 아주 좁다. 이 점은 이승만의 경제 사상을 이해하는 데 긴요하다. 대조적으로, 중경 임시정부가 1941년 11월에 공표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은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했다. 그래서 “전국의 토지와 대생산 기관의 국유”를 기본 경제정책으로 삼았다.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이끌게 되자, 그는 시장경제가 뿌리를 내리도록 힘썼다. 귀속 재산을 불하할 때, 그는 둘레의 반대를 물리치고 대기업들도 민간에 불하하도록 주선했다. 농지 개혁을 할 때도, 그는 ‘유상 몰수 유상 분배’를 원칙으로 삼아 시장경제의 기본인 재산권을 최대한 보호하면서 지주들의 보상금이 산업에 투자되도록 유도했다.
아울러 그는 국민들이 기업가 정신을 지니도록 독려했다. 한국 주재 외국인들이 한국 특색이 있는 성탄 카드와 선물을 고국으로 보내려 해도 마땅한 물건이 없다는 얘기를 듣자, 그는 담화를 발표했다.
“작년에 성탄 선물과 성탄 엽서를 많이 만들어서 팔게 하라는 담화를 낸 후에 그 성적이 매우 좋아서 외국인들이 이 엽서와 기념품을 사다가 자기 나라에 많이 보냈던 것인데, 우리 한국인들도 차차 눈이 떠서 1년 동안 틈틈이 만들어 두었다가 때맞춰 팔 것으로 기대했던 바, 금년에 아직도 이런 물건이 장에 나오거나 PX에 진열된 것이 도무지 없다. (…)
우리 경제를 걱정하는 친구들이 말하기를, 한국 풍속과 특색을 그린 엽서들이 일본에서 들어온다 하며, 한국에서 난 것이 있으면 이것을 쓰겠는데 부득이 일본 것을 사게 된다 하니 우리 경제 발전을 이런 데까지라도 주의하여 생각하지 못하면 세계에서 도와주려고 해도 생활 개선이 안 될 것이니, 모두 각성해서 부지런히 무엇이든 만들어 발전케 해야 할 것이다.”
경제개발 계획 수립
어렵사리 시장경제 체제를 갖추었지만, 1930년대 중엽에 시작된 중일전쟁 이래 큰 전쟁들을 치르느라 피폐한 한국 사회에서 민간 부문의 역량엔 큰 제약이 있었다. 아울러, 미국과 국제연합이 제공한 대규모 원조는 정부 부문의 합리적 계획을 요구했다.
이 대통령은 경제 발전을 위해선 전략적 분야에 대한 정부의 투자가 긴요하다는 점을 잘 인식했다. 대한민국이 서자, 그는 바로 ‘산업 부흥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1) 민수 공업품의 자급자족 2) 수출 공업 진흥 3) 중공업 육성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대한민국 역사에 처음 나온 ‘종합적 중기 계획’인 이 멋진 계획은 6·25전쟁으로 무산되었다.
원자로 기공식 첫 삽 - 한국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인 '트리가 마크 2호' 기공식(1959)에서 첫 삽을 뜨는 이승만.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마침 그해는 하와이 이민 50주년이었다. 1902년 12월에 121명이 일본 여객선 겐카이마루를 타고 제물포를 떠났다. 이들 가운데 절반가량이 조지 존스 목사 부부가 운영하던 안골예배당(내리교회) 신도였다. 그래서 하와이 이민 다수는 기독교 신앙이 깊었고, 이민 사회는 침례교회 중심으로 움직였다. 세 해가 채 못 되는 기간에 7500명가량 되는 조선인들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하와이 이민은 조선 역사상 첫 공식 이민이었고 가장 성공적인 집단 이민이었다. 그리고 하와이는 이승만의 ‘제2의 고향’이었다. 그는 1913년부터 하와이의 젊은 세대를 가르쳤고 그곳 동포들의 충실한 지지 덕분에 긴 세월을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은 하와이 이민 50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인천에 좋은 공대를 세우기로 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하와이에 설립해서 운영했던 ‘한인기독학원’을 처분한 대금을 대학 설립의 종잣돈으로 삼았다. 그 돈에 하와이 동포들의 성금과 국고 보조금을 보태서 대학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 대학 이름은 인천의 인(仁)자와 하와이의 하(荷)에서 따서 인하공과대학(IIT)이라 지었다. 두 해 뒤, 금속, 기계, 광산, 전기, 조선, 화학공학 여섯 학과에서 신입생 179명을 받아들였다.
그가 처음 공대 설립을 밝히자, 미국 대사관 사람들은 드러내놓고 비웃었다. 치열한 전쟁을 하느라 생존을 걱정하는 나라에서 웬 공대냐는 얘기였다. 이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1958년엔 인하공대와 서울공대에 원자력학과를 설치하도록 했다. 이듬해에 원자력연구소를 세우고 시험용 원자로를 설치하려는 계획에 선행하는 조치였다. 그 뒤 일은 우리가 잘 아는 역사다. -조선일보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