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슬하에 있었던 짧은 세월이 허공에 맴돌다가 아련하게 멀어진다.
내 집 내 부모, 내가 태어난 곳, 고향은 이젠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다만 그대로 그 자리에 흙으로만 있을 뿐이다.
거기 발 붙여서 지내든 우리 부모는 안 계실지 몰라도 난 아직도 못 잊어서 보고 또 보고 기리고 있구나.
허공에 뜬 삶을 가라앉히고 이웃과 어울려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이 짧은 일생을 찬미해야 하련만 난 아직 거기에 못 미치는구나.
그것은 내가 해야 하는 지극히 작은 효성에도 못 미치는 우리 부모·형제에게 진 빚, 그 빚을 갚을 길을 못 찾아서 허우적대는 이 무지렁이가 무엇을 바탕으로, 어떻게 입 벌리고 활개 칠 수 있겠느냐 싶어서 그렇다.
난 나비가 되지 못하고 아직 벌레에 머물러 있다. 탈피할 집이 없으니 나를 탈피 하지 못한다. 내가 잘 안다. 터질 것만 같은 이 가슴을 포근하게 감싸줄 내가 난 산야와 마을의 흙을 밟아 보고 냄새 맡아보지 않고는 난 아직 벌레이다. 벌레가 집을 짓지 못했으니 조급한 마음으로 몸부림만 치는구나.
고향 땅을 딛고 동해의 수평선을 눈 가득히 채워 넣고서 양팔을 벌려 그 끝에 대어 보고 싶구나.
이렇게 노래하고 꼼지락거리는 힘은 내 고향의 산천, 나의 부모·형제가 있는 고향이 내 영혼의 집이기에 이렇게라도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이나마 이렇게라도 꼼지락거리는 것은 고향이 아무리 폐허가 되었어도, 우리 부모가 어떤 상황에서 돌아가셨건, 다 내 영혼의 울이 되고 힘이 되어 오늘에 내가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립다. 고향 집 마당의 짚가리, 그 냄새를 맡아보고 싶다. 쌓인 한을 어찌 매봉산에 비길 수 있으며, 맑은 ‘염성천’이 넘쳐흐른들 어찌 내 흘린 눈물의 값어치에 버금하며, 제방 끝머리의 정자를 쓰러뜨린 태풍인들 어찌 내 고향 그리는 한숨에 비길 수 있을 것인가!
난 무엇 때문에 사는가? 왜 이렇게 고뇌해야 하는가? 내가 진 죗값을 내가 치르려 하지만 어쩔 수 없구나. 그리움의 한숨이 어찌 손에 잡히는 티눈만큼의 고향 흙먼지에 비길 수 있겠는가? 이토록 그립다. 보고 싶다.
난 조급하다. 그러나 태연해지려 한다. 나를 있게 하는 힘이 아직은 나와 교감하며 어버이가 묻히신 거기가 내 고향이라고 이르기 때문이다.
나의 힘은 간절히 바라는 내 원의(願意)를 허락하시는 절대자에 의해서 이끌리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회귀성 본능일 뿐이니 당초에 작심한 풍운의 꿈, 신명에의 고유(告由)는 오로지 진토로 되어서만 가능할 것 같아 그때 방랑을 끝내고 내 힘을 다하여 흙냄새를 맡을 것이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