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6.940422 친구 진동협
황량한 벌판 위에 블록집들이 늘어서 있다. 이 조그마한 동네의 변두리, 좁은 길가에는 노점상들이 촘촘히 들어차 있다. 자전거와 지게꾼이 바삐 움직이는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는 반백의 늙은이가 손가방을 놓칠세라 옆구리에 꼭 끼고, 오가는 사람들과 부닥치는 어깨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걷는다. 부지런히 걸어가다가 가게 안에 들른 중년은 주인아줌마와 무엇인가 잠시 이야기하더니 곧바로 가게 문을 열어젖히고 쏜살같이 빠져나와 장꾼무리와 어울려 장바닥을 뚫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보지 않고도 눈에 선한 ‘진 동협’의 자태다.
아무도 모르는, 사고무친의 그가 이곳 울산 땅에 와 지금 막 들어선 곳은 신용을 바탕으로 일궈가며 일수놀이를 하는 한 아저씨의 가게다. 그는 이 가게를 성의와 신의로 오늘이 있게 한 일꾼이다. 그는 여기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외로움을 달래려고 교회도 열심히 찾았고 이웃도 형편에 따라 자기 힘닿는 대로 도왔다. 그러나 가난을 삶의 지상목표라도 정한 듯, 씻어지지 않는 가난을 군소리 없이 짊어진다.
이제 그는 갔다. 쓸 수 있는 제 장기는 모조리 생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이웃에게 갈기갈기 찢어 나누어주었다. 줄 수 없는 세포 한 조각까지 드러내서 학생들에게 실험재료로 활용되는, 한 대학병원의 영원한 파수병이 되었다. 장하다. 비록 해골의 형태지만 지상의 모든 이가 시간적 제약 없이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죽었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대학병원과 함께하리라.
죽은 친구의 한이 서려 있는 깨알 같은 유필(遺筆)과 유품들을 하나같이 소중히 간직하였다가 언젠가 오게 될 그 날에 고향에 두고 온 친구 형님에게, 형님조차 돌아가셨다면 그 자식들에게 반드시 전해서,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여기서 살다가 돌아가셨노라고 전해주어야 비로써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거듭 당부하고 눈물을 훔칠 겨를도 없이 돌아서 나오는 산 친구, 나의 가슴은 또 다른 내, 아니 살아있는 나의 뜻을 죽어간 친구의 뜻으로 포장하여 말로 일러주었는지 모르겠다.
짐작하리다. 외롭게 살아야 하는 현실 속에서 그나마 이웃을 사랑하므로 내 위안을 찾는 믿음의 노도(怒濤)에 제 몸을 맡겼던 친구. 자아는 깡그리 무시하고 오직 한 시대를 이은 희생, 젊은 넋들이 수없이 희생됐을 때도 나와 더불어 몇 명만이 살아남은 친구, 이제 이 덤의 삶이 죽은 뭇 동료들의 값없는 죽음에 합당한 보상이라도 됐으면 했을 것이다. 친구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는다. 무엇이라고 할까? 더 살았더라면 무엇을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자문해 보면서 죽음의 의미를 찾는다. 죽은 이에서 산내가 발견되고 산 나에게서 죽은 친구를 느끼게 하는 기구한 생, 친구와 나는 동질이면서도 그 핵(核)이다.
영정을 대하는 살아있는 친구 나, 나의 가슴은 미어지고 북받치는 설움을 주체할 길 없다. 상주와 대면도 하는 둥 마는 둥 영안실 마루턱에 걸터앉아 누가 보든 말든 울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들썩이는 어깨와 손수건이 연달아 오르내리는 나를 느꼈을 때, 비로써 상주와 마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얼굴을 돌리고 울었다. 얼마를 지나, 다시 상주와 미망인을 차례로 맞대고 친구 ‘진동협’의 삶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갈림길에 대해 조심스레 알아보는 산 친구의 눈에는 여전히 줄기줄기 눈물이 흘러서 말문을 잇지 못하는데, 상주와 미망인은 오히려 담담히 자초지종을 자상하게도 이야기해 준다.
더는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고 어디 가서 실컷 울고 싶은 충동만이 가득하다. 상주 형제와 미망인에게 산 친구는 죽은 친구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산 사람으로서 어쩌면 가족이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영역의 세계를 이제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말하고자 한다.
그 넓은 땅과 그렇게 많이들 가진 돈의 유혹이 성스러우리만큼 물리치고, 청렴하게 살아가려는 단호한 각오로, 삶의 수단으로 내 한 몸을 던져서 마치 연어가 자기 몸을 자기 새끼의 먹이로 내 던지는 심경에서 내 몸을 사회에 기증하고 떠나는 친구, 세상에 남아 있을 식구들에게 잘못하지 않으려는 갸륵한 심정, 벌어놓은 재산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인간 백사에 홀연히 자기 몸을 던져 가족의 안위를 보장하여 영원히 그 아픔을 잊게 하는 유언의 자기 신체 기증, 친구를 감히 누가 흉내 낼 수 있으랴! 살아있는 못난 친구의 자기중심적인 풀이겠으나 죽은 친구의 천상과 천하를 통 틀은 생각의 어느 조각이나마 이렇게 헤아린다면 친구는 그것으로 기꺼워하리라, 짐작해 본다.
갈 때 생각했든 장례식과 장지에 가보지 못하는 산 친구, 나의 마음은 영혼의 슬픔이 배인 한숨이 겨울바람처럼 차갑게 새어 나왔다. 내일이면, 의학도들의 경건한 묵례(黙禮)와 엄숙한 생명 존엄의 선언을 지도교수로부터 폐부를 찌르듯이 전해 들은 학생들의 칼날에 죽은 친구의 구석구석이 해부되고, 발려지고, 뜯기고, 이겨지고, 잘리고, 파이고, 갈리고, 잘릴 것이다.
친구여 참아라! 그리고 영원해라! ‘진동협!’ 뒷날 보자꾸나! 절대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으니 네 몸의 모든 것은 그 절대자의 뜻대로 되느니라. 목이 메어 말문을 막고 눈물이 괴어 책을 볼 수도 없다. 노래를 들을 수도 없고 밖을 내다본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같은 날 같은 학교에서 출발한 철부지들의 인생역정과 고별의 쌍곡선이 이렇게 엇간다./외통- >황량한 벌판 위에 블록집들이 늘어서 있다. 이 조그마한 동네의 변두리, 좁은 길가에는 노점상들이 촘촘히 들어차 있다. 자전거와 지게꾼이 바삐 움직이는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는 반백의 늙은이가 손가방을 놓칠세라 옆구리에 꼭 끼고, 오가는 사람들과 부닥치는 어깨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걷는다. 부지런히 걸어가다가 가게 안에 들른 중년은 주인아줌마와 무엇인가 잠시 이야기하더니 곧바로 가게 문을 열어젖히고 쏜살같이 빠져나와 장꾼무리와 어울려 장바닥을 뚫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보지 않고도 눈에 선한 ‘진 동협’의 자태다.
아무도 모르는, 사고무친의 그가 이곳 울산 땅에 와 지금 막 들어선 곳은 신용을 바탕으로 일궈가며 일수놀이를 하는 한 아저씨의 가게다. 그는 이 가게를 성의와 신의로 오늘이 있게 한 일꾼이다. 그는 여기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외로움을 달래려고 교회도 열심히 찾았고 이웃도 형편에 따라 자기 힘닿는 대로 도왔다. 그러나 가난을 삶의 지상목표라도 정한 듯, 씻어지지 않는 가난을 군소리 없이 짊어진다.
이제 그는 갔다. 쓸 수 있는 제 장기는 모조리 생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이웃에게 갈기갈기 찢어 나누어주었다. 줄 수 없는 세포 한 조각까지 드러내서 학생들에게 실험재료로 활용되는, 한 대학병원의 영원한 파수병이 되었다. 장하다. 비록 해골의 형태지만 지상의 모든 이가 시간적 제약 없이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죽었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대학병원과 함께하리라.
죽은 친구의 한이 서려 있는 깨알 같은 유필(遺筆)과 유품들을 하나같이 소중히 간직하였다가 언젠가 오게 될 그 날에 고향에 두고 온 친구 형님에게, 형님조차 돌아가셨다면 그 자식들에게 반드시 전해서,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여기서 살다가 돌아가셨노라고 전해주어야 비로써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거듭 당부하고 눈물을 훔칠 겨를도 없이 돌아서 나오는 산 친구, 나의 가슴은 또 다른 내, 아니 살아있는 나의 뜻을 죽어간 친구의 뜻으로 포장하여 말로 일러주었는지 모르겠다.
짐작하리다. 외롭게 살아야 하는 현실 속에서 그나마 이웃을 사랑하므로 내 위안을 찾는 믿음의 노도(怒濤)에 제 몸을 맡겼던 친구. 자아는 깡그리 무시하고 오직 한 시대를 이은 희생, 젊은 넋들이 수없이 희생됐을 때도 나와 더불어 몇 명만이 살아남은 친구, 이제 이 덤의 삶이 죽은 뭇 동료들의 값없는 죽음에 합당한 보상이라도 됐으면 했을 것이다. 친구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는다. 무엇이라고 할까? 더 살았더라면 무엇을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자문해 보면서 죽음의 의미를 찾는다. 죽은 이에서 산내가 발견되고 산 나에게서 죽은 친구를 느끼게 하는 기구한 생, 친구와 나는 동질이면서도 그 핵(核)이다.
영정을 대하는 살아있는 친구 나, 나의 가슴은 미어지고 북받치는 설움을 주체할 길 없다. 상주와 대면도 하는 둥 마는 둥 영안실 마루턱에 걸터앉아 누가 보든 말든 울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들썩이는 어깨와 손수건이 연달아 오르내리는 나를 느꼈을 때, 비로써 상주와 마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얼굴을 돌리고 울었다. 얼마를 지나, 다시 상주와 미망인을 차례로 맞대고 친구 ‘진동협’의 삶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갈림길에 대해 조심스레 알아보는 산 친구의 눈에는 여전히 줄기줄기 눈물이 흘러서 말문을 잇지 못하는데, 상주와 미망인은 오히려 담담히 자초지종을 자상하게도 이야기해 준다.
더는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고 어디 가서 실컷 울고 싶은 충동만이 가득하다. 상주 형제와 미망인에게 산 친구는 죽은 친구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산 사람으로서 어쩌면 가족이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영역의 세계를 이제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말하고자 한다.
그 넓은 땅과 그렇게 많이들 가진 돈의 유혹이 성스러우리만큼 물리치고, 청렴하게 살아가려는 단호한 각오로, 삶의 수단으로 내 한 몸을 던져서 마치 연어가 자기 몸을 자기 새끼의 먹이로 내 던지는 심경에서 내 몸을 사회에 기증하고 떠나는 친구, 세상에 남아 있을 식구들에게 잘못하지 않으려는 갸륵한 심정, 벌어놓은 재산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인간 백사에 홀연히 자기 몸을 던져 가족의 안위를 보장하여 영원히 그 아픔을 잊게 하는 유언의 자기 신체 기증, 친구를 감히 누가 흉내 낼 수 있으랴! 살아있는 못난 친구의 자기중심적인 풀이겠으나 죽은 친구의 천상과 천하를 통 틀은 생각의 어느 조각이나마 이렇게 헤아린다면 친구는 그것으로 기꺼워하리라, 짐작해 본다.
갈 때 생각했든 장례식과 장지에 가보지 못하는 산 친구, 나의 마음은 영혼의 슬픔이 배인 한숨이 겨울바람처럼 차갑게 새어 나왔다. 내일이면, 의학도들의 경건한 묵례(黙禮)와 엄숙한 생명 존엄의 선언을 지도교수로부터 폐부를 찌르듯이 전해 들은 학생들의 칼날에 죽은 친구의 구석구석이 해부되고, 발려지고, 뜯기고, 이겨지고, 잘리고, 파이고, 갈리고, 잘릴 것이다.
친구여 참아라! 그리고 영원해라! ‘진동협!’ 뒷날 보자꾸나! 절대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으니 네 몸의 모든 것은 그 절대자의 뜻대로 되느니라. 목이 메어 말문을 막고 눈물이 괴어 책을 볼 수도 없다. 노래를 들을 수도 없고 밖을 내다본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같은 날 같은 학교에서 출발한 철부지들의 인생역정과 고별의 쌍곡선이 이렇게 엇간다./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