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3년, 회시(會試)의 시무책(時務策)은 법제(法制)를 묻는 출제였다. 문제는 이랬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법제가 있다. 법제가 타당하면 정치가 간결해서 백성이 편안했고, 법제가 요점을 잃으면 정사가 번잡해져서 백성이 원망한다. 한 나라의 치란은 법제에 좌우된다. 어찌해야 법제가 제자리를 얻고, 정사가 바르게 설 것인가?
윤선도(尹善道·1587~1671)는 글의 서두에서, 맹자가 “한갓 법으로는 저절로 행해질 수가 없다(徒法不能以自行)”고 한 말을 인용하고, “정치만 있고 그 마음은 없는 것을 ‘도법(徒法)’이라 한다(有其政而無其心, 是謂徒法)”고 한 주자의 풀이를 끌어왔다. 백성을 위한 마음 없이 정치를 위해 만든 법제는 도법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어 말했다. “법이란 정치를 보좌하는 것이고, 마음은 법을 만드는 것이다. 법이 아니고는 정치를 할 수가 없고, 마음이 아니고는 법을 만들 수가 없다. 대개 남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과 같게 하여, 도끼 자루를 벨 때 잡은 도끼 자루에 말미암는다면, 어찌 내 마음을 닦지 않으면서 능히 법을 세움이 있으며, 어찌 내 마음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서, 능히 법을 행함이 있겠는가? 선왕이 천하에 법이 되어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그 마음을 바로 하였기 때문이고, 후세가 법을 세우고도 폐단이 일어나고, 명령이 나와도 행해지지 않은 것은 그 마음을 닦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끼 자루를 벨 때 잡은 도끼 자루에 말미암는다는 글 속의 말은 출전이 있다. 『시경』 「벌가(伐柯)」편에 “도끼 자루를 베고, 도끼 자루를 벰이여. 그 법칙이 멀지 않네(伐柯伐柯, 其則不遠)”라 했다. 도끼 자루감을 마련하기 위해 나무를 벨 때는 손에 쥔 도끼 자루를 기준으로 삼으면 되는데, 자꾸 멀리서 딴 기준을 찾으려 든다는 말이다. 『중용』 13장에서도 “도끼 자루 잡고서 도끼 자루를 베면서, 둘러보아 살피며 멀다고 생각한다(執柯以伐柯, 睨而視之, 猶以爲遠)”고 했다. 표준이 자기 손에 있는데도 엉뚱한 데서 기준을 찾는 어리석음을 말한다.
마음은 안 고치고 제도만 고치려 드는 사이에 민심은 저만치 떠나고 없다. 마음이 그대론데 제도를 바꾼다고 망가진 정치가 바로 서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