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논의 책 아버지는 멋진 책을 잘 만들었다 봄과 여름 사이 오월의 논에 아버지 산골짝 물 들여와 소와 쟁기로 해마다 무논의 책 만든다 모내기 전의 무논은 밀서(密書)다 하늘과 땅이 마주보는 밀서 속으로 바람이 오고 구름이 일어나고 꽃향기 새소리도 피어나는 무논의 책 어머니 아버지 책 속으로 걸어가면 연둣빛 어린모가 따라 들어간다 초록 치마를 펼쳐놓은 책 위로 하늘이 구름 불러 햇볕과 비를 앉히고 한철 또록또록 그 책 다 읽고나면 밥이 나왔다 무논의 책이 나를 키운다 /이종암 모내기 전 논을 갈고 써레질을 해 놓고 논두렁을 하면(논물이 빠 져나가지 않도록 논 가장자리를 잘 메워 단장하는 것을 논두렁한다고 한다) 빨래한 새 옷처럼 논도 새것이 된다. 흙물이 가라앉으면 거기 하늘이 내려와 반짝인다. '구름이 일어나고 꽃향기 새소리도 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심오한 책이다. 어머니 아버지 어린아이 책 읽는 소리처럼 모를 심어나가고 그 책에 엎드려 땀 흘려 몇 번이고 읽어내면 일용할 밥이 나온다. 거기 하늘의 햇빛과 바람과 풀잎들이 적어나가는 문장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알려주는 성인의 말씀과 다름없었으리라. 책장의 책보다 훨씬 아름다운, 훨씬 실용적인, 그러나 읽기에 고된 경서(經書)가 아닐 수 없다.
지금 한창 모내기 끝난 논의 벼들이 뿌리를 내리고 생기 돋아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빼어난 문장처럼 반짝여서 삽을 어깨에 멘 할아버지 금니도 빛난다.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조선일보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