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말의 전각가 등석여(鄧石如)의 인보(印譜)를 들춰보는데 '심한신왕(心閒神旺)'이란 네 글자를 새긴 것이 보인다. 마음이 한가하니 정신의 활동이 오히려 왕성해진다는 말이다. 묘한 맛이 있다. 내가 "천자문"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네 구절은 이렇다. "성품이 고요하면 정서가 편안하고, 마음이 움직이면 정신은 피곤하다. 참됨을 지켜야만 뜻이 온통 가득 차고, 외물을 따라가자 뜻이 함께 옮겨간다.(性靜情逸, 心動神疲. 守眞志滿, 逐物意移.)" 고요해야 평화가 깃든다. 마음이 이리저리 휘둘리면 정신이 쉬 지친다. 참됨을 간직하니 뜻이 충만해진다. 바깥 사물에 정신이 팔리면 뜻을 가누기가 힘들다. 고요해야 활발하다. 흔들리면 어지럽다.
잡다한 속사에 치여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 보면 뜻도 덩달아 미친 널을 뛴다. 답답해 깊은 산속을 찾아서도 머릿속엔 온통 딴 궁리만 가득하다. 정신이 왕성한 것과 마음이 바쁜 것을 혼동하면 안 된다. 고이기가 무섭게 퍼가기 바빠 마음은 이내 바닥을 드러낸다. 정신은 늘 피폐해 있다. 왜 이러고 사나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불쑥불쑥 솟는다.
송나라 때 이종이(李宗易)가 '정거(靜居)'란 시를 지었다. "마음이 넉넉하면 몸도 따라 넉넉하니, 몸 한가한데 마음만 바쁘니 다만 걱정 이것일세. 마음이 한가로워 어데서건 즐긴다면, 조시(朝市)와 구름 산을 따질 것 굳이 없네. (大都心足身還足, 只恐身閑心未閑. 但得心閑隨處樂,不須朝市與雲山.)" 문제는 마음이다. 마음이 여유로워 한갓지면 일거수일투족에 유유자적이 절로 밴다. 문제는 몸은 한가로운데 마음이 한가롭지 못한 상태다. 갑자기 일에서 놓여나 몸이 근질근질해지면, 공연히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진다. 몸뚱이는 편한데 마음은 더없이 불편하다. 관건은 몸을 어디 두느냐가 아니라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있다. 사람은 '마음이 넉넉해 몸도 따라 넉넉해야지(心足身還足)', '몸은 한가한데 마음은 한가롭지 못한(身閑心未閑)' 지경이 되면 안 된다.
일 없는 사람이 마음만 바쁘면 공연한 일을 벌인다. 마음이 한가로우면 정신의 작용이 활발해져서 건강한 생각이 샘솟듯 솟아난다. 내 마음의 상태를 어떻게 유지할까? 나는 마음이 한가로운 사람인가? 몸만 한가롭고 마음은 한가롭지 못한 사람인가? 그도 아니면 몸이 하도 바빠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인가?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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