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차(忍冬茶)
노주인의 장벽(腸壁)에
무시로 인동(忍冬) 삼긴 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여 붉고,
구석에 그늘 지여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냄새 훈훈히 김도 서리다가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에 책력(冊曆)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정지용(1902~1950)
겨울의 막바지다. 봄인가 싶으면 다시 추위가 게릴라처럼 기습한다. 올겨울은 유난히 길고 추위가 절절했다. 산중(山中)의 겨울은 더해서 겨울의 막바지에는 아예 문밖출입이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긴 겨울나기의 지혜를 아는 노인의 지긋한 마음이 수다스럽지 않고 담담하다. '겨울을 견딘다'는 이름의 차인 인동(忍冬)차를 '무시'로 마시면 식어가던 몸 안의 장벽(腸壁)에서도 '덩그럭 불'(장작의 다 타지 않은 덩어리에 붙은 불)이 다시 피어나고 방 안의 자작나무 화롯불도 도로 붉어진다. 그것이 지용(芝溶)류(類)의 절묘한 맛! 달력(冊曆)도 치우고 견디는 겨울에 욕망을 다 잠재운 큰 평화가 있지만 오랜 추위만큼은 좀 혹독하여 그늘 속 '순 돋는 무'가 반갑다는 이야기다. 아직 녹지 않은 잔설(殘雪) 속에 꿈틀거리는 연두의 봄빛이 있을 것만 같다.
아무 이야기 같지 않으나 들추고 들어갈수록 드러나는 이 미감(美感)은 고전(古典)의 빛나는 가치다.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