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계(默契)
뭔가 있지 싶은 우수절(雨水節) 이른 아침
신선한 한 젊은이 모자 벗어 손에 들고
한 발짝 물러선 곳에 다수굿한 새색시.
그들은 의논스레 날 넌지시 건너다보고
나는 벌써 요량한 듯 가벼이 점두(點頭)했다
그렇지, 까치저고릿적 그 전부터의 친구들.
하여, 내 하늘 한 귀에 둥지 틀고
두세 마리 새끼 쳐서 요람 위에 얹어 두고
신접 난 젊은것들은 죽지 쉴 새 없구나.
이제 저 어린것들 내 너머로 날려 보내고
저것들도 머리 세어 제 곳으로 돌아가면
난 다시 대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겠지. /장순하
우수(雨水)가 지나면 봄빛이 한층 선명해진다. 깊은 골짝에도 얼음 깨우는 물소리가 맑고 높다. 봄의 '신접(新接)'들이 곳곳을 털고 여느라 분주하다. 봄의 권속(眷屬)에 드는 일은 다 신접살림이다. 겨울잠에서 먼저 깨는 복수초며 실눈으로 경칩(驚蟄)을 기다릴 개구리도 곧 새로운 살림을 차릴 것이다. 그럴 즈음에 '까치저고릿적 그 전부터의 친구들'의 신접을 맞으면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그 모두가 '내 하늘 한 귀퉁이에 둥지 틀고' '죽지 쉴 새 없'이 드나드는 게 봄이다. '삼포'세대도 '포기 대신 죽기 살기'로 부디 신나는 신접 많이 차리기를!
/정수자·시조시인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