놉새가 불면
놉새가 불면
唐紅 연도 날으리
鄕愁는 가슴 깊이 품고
참대를 꺾어
지팽이 짚고
짚풀을 삼어
짚세기 신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슬프고 고요한
길손이 되오리
놉새가 불면
黃나비도 날으리
生活도 葛藤도
그리고 算術도
다 잊어버리고
白樺를 깎아
墓標를 삼고
凍原에 피어오르는
한 떨기 아름다운
百合꽃이 되오리
놉새가 불면―
/이한직(1921~1976)
한 개결(介潔)한 정신을 본다. 아버지가 친일파의 거두였다지만 소년의 내면은 속죄의 마음이 있어서 시심(詩心)을 키우고 또 우리말을 닦아서 마침내 열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시인 정지용의 추천으로 시인이 된 분이다. 평생 스무남은 편의 시를 남겼다.
겨울이 끝나갈 때 "높새바람이 분다"고 한다. 봄이 온다는 징조다. 그러나 어쩌자고 이 사람은 높새가 불면 여기를 떠나가자는 것인가. 향수가 자욱하겠지만 그것마저 가슴 깊이 품을 각오를 하고. 참대 지팡이와 '짚세기' 신은 가난한 차림으로, 아니 가난한 차림이 아니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차림으로 떠나자고 한다. 게다가 '凍原에 피어오르는/ 한 떨기 아름다운/ 百合'이라면 죽음의 세계이다. 그것은 겨울의 혹독 속에서만 영원을 생각하며 살고 싶은 정신의 표상이 아니겠나 싶다. '算術'이 없는 세계, 즉 '겨울 정신'을 놓지 않으려는 시인이었던 것이다. 겨울보다 더 황량한 건 산술로만 된 관계가 아닌지.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