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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 정희 이야기

 

 

추사 김정희’가  귀양길에 올랐다. 약관의 나이에 그 글씨와 학문의 깊이로 이름을 날리던 득의의 세월을 뒤로 한 채 떠나는 귀양길이다. 제주도로 건너가기 전, 해남 대흥사에 들렸다. 마음을 나누는 벗,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두 친구는 대흥사 경내를 돌아보기시작합니다. 대웅전 안 뜰에 들어섰는데 김정희의 눈에 대웅전 현판이 한 눈에 들어 왔다. “大雄寶殿(대웅보전)”,조선 후기, 조선 특유의 글씨체 동국진체(東國眞體)를 개발한‘원교 이광사’의 글씨입니다.‘칼국수 면발 (유흥준이 평하길)’같은 느낌을 주는 골계미의 글씨였습니다.

 

김정희가 버럭 화를 냈다.   “이보게 초의  조선의 글씨를 다 망친 게 원교 이광사이네 알만한 사람이 어찌 저런 현판을 내걸 수 있나? 당장 태워버리게 차라리 내가 하나 써줌세". 지긋이 미소 짓는 초의 스님, 친구가 하자는 대로 해줬다.

 

 

대웅보전 현판을 떼어 뒤뜰 창고에 넣어두고, 큰 붓에 함빡 먹을 묻혀 쓴 김정희의 无量壽閣 (무량수각) 현판을 대신 내 걸었다.‘중국집탕수육(-유흥준)’같은 기름진 느낌의 글씨였다.

 

짧게 끝날 유배생활인 줄 알았다. 그런데 18년이나 흘렀다. 득의양양한 장년에서 모진 풍상을 겪은 백발의 노인이 된 김정희는 유배지를 떠나 이번에도  초의 스님을 만나기 위해 대흥사를 찾았다.

 

대흥사 뜰을 거닐던, 김정희, 어디선가 낯익은 글씨를 발견했다.  18년 전 자신의 글씨였다. 낯빛의 동요를 애써 감추고 지나쳤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초의 스님과 더불어 차를 마실 때“초의, 자네 내가 태워버리라던 원교 이광사의 글씨 어쨌나”.18년 전 그때의 미소로 “태우기엔 아까워 창고에 넣어두었네”. 짐짓 다른 곳을 쳐다보며“내가 쓴 현판은 태워버리게 그리고 원교의 글씨를 다시 내 걸게나”. 그리고 김정희는 떠났다.

 

대웅전 현판은 다시 원교 이광사의 것으로  바꿨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는 어떻게 되었을까? 초의스님은 이번엔 친구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대웅전 옆에 또 다른 건물을 짓고 그곳에 무량수각 현판을 걸어놓았다. 지금도 걸려 있다. 원교 이광사의 글씨와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그 풍경이 함축하고 있는 추사 김정희의 인생, 그 깨달음의 과정을 음미해본다. 

 

김정희 [金正喜, 1786~1856]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본관 경주. 자 원춘(元春).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하였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충청우도암행어사·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24세 때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 옹방강 (翁方綱)·조강(曹江) 등과 교유, 경학(經學)· 금석학 (金石學)·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예술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淸)나라의 고증학 을 바탕으로 하였다. 1840년(헌종 6)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나왔고,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 (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 (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황초령 (黃草嶺)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 (巡狩碑)를 고석(考釋)하고, 18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 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며,‘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혔다.  또한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 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 [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 (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廣州) 봉은사 (奉恩寺)에서 구족계 (具足戒)를 받은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문집에 《완당집(阮堂集)》, 저서에 《 금석과안록 (金石過眼錄)》 《완당척독(阮堂尺牘)》 등이 있고, 작품에 《 묵죽도 (墨竹圖)》 《 묵란도 (墨蘭圖)》 등이 있다. 호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등 가장 많은 호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있다./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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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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