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는 친형인 문종보다 3년 늦게 1417년 세종과 소현황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유,자는 수지 였다.
어릴때부터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뛰어났고 병약한 친형 문종과는 달리 무예에 능하고 성격이 대담했다.
그는 어린시절 진양대군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27년)에 수양대군으로 개봉 되었다. 대군시절 세종의 명에 따라 궁정내에 불당을 조성하고 승려 심미의 아우인 김수온과 함께 불교서적 번역을 관장했으며 향악의 악보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문종 2년인 1452년에 관습도감도 제조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나라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그는 단종이 즉위하자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다가 1453년 10월 계유정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뒤 1455년 6월 단종을 강압하여 왕위를 찬탈하고 조선의 7대왕인 세조가 되었다.
그의 나이 39세때이다. 세조는 즉위 후 단종을 상왕으로 모셨으나 이듬해 좌부승지 성삼문등 이른바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출신 관료들이 단종복위를 계흭한 것을 기화로 상왕 단종을 노산군으로 감봉하여 영월에 유폐시켰다.
다시 1457년 9월에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이 유배지 순흥에서 승흥부사 이보흠과 모의하여 단종복위 거사 직전 관청 노비의 고발로 발각되자 동생금성을 처벌한 후 단종도 관원을 시켜 죽였다.
그는 자신의 왕권에도전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왕권강화정책을 착수했다.
일종의 내각제인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왕권제인 육조직계제를 단행했다. 집현전 학사들의 단종복위 사건을 빌미로 세종이후 대표적 학자 배출소이던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정치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앴으며 그곳에 설치된 서적들을 모두 예문관으로 옮겨버렸다.
이로인해 국정을 건의하고 규제하던 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되고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국가사무의 모든 중대사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세종이후 강화되었던 문치는 약화되고 전제독재 정치로 변했다. 세조는 이 박에도 왕권강화책으로 백성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태종조에 실시했던 호패법을 복원했으며 동국통감을 편찬해 전대의 역사를 조선왕조의 견지에서재조명하고 국조보감을 편수해 태조부터 문종에 이르는 4대의 치법을 정모(政謀) 편집 후왕의 통치법칙으로 삼았다.
이 밖에도 왕권정치의 기준이 될 법제를 마련 최광으로 하여금 "경제육전"을 정비하게 했으며 왕조의 총체적 비젼인 '경국대전"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1460년에는 호구의 동향을 파악하여 호(집)의 규모를 규제하기 위한 법전인 호전(戶典)을 복구했으며 이듬해인 1461년에 형량을 규정한 형전(刑典)을 개편 완성했다.
역모와 외침에 대비 군정을 정비하고 각 고을에 명기하여 병기(무기)를 만들도록 했으며 모든 읍과 병영에 둔전을 파악하고 모든 도에 군적사를 파견, 군정누락을 조사하게 했다.
관제도 대폭 개혁, 영의정 부사를 영의정으로, 사간 대부를 대사간으로도관찰출석자는 관찰사로,오위진무사는 오위도총관으로 병사도절제사는 병마절도사로 명칭을 간소화 했다.
종래의 현직과 휴직 또는 정직 관원에게 나누어 주었던 과전을 현직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를 실시해 국비를 줄였으며 지방관리들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병마절도사는 그 지방 출신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대체했다.
이같은 중앙 문신 위주의 정책은 지방호족의 반발을 사 " 이시애의 난" 같은 반란을 낳기도 했다.
함경도 길주에서 일어나 한 때 전운이 휩싸이기도 했으나 세조는 이 난을 무사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다졌고 민생안정책에도 소흘히 하지 않았다.
민간에 만연해 있었던 공물대납 행위를 엄격히 금했으며 양잠 농업기술 보급을 위해 "잠서" 훈민정음으로 해석하고 백성들의 윤리교과서인 "오륜록"을 찬수해 윤리기강을 바로 잡았다.
명과 왜에 유화정책을 펴 변방에 안정을 꾀했으며 문화사업으로 "역학계몽" "주역구결" "대명률강해" "금강경연해" "대장경"등을 인쇄 간행하고 태조로 부터 문종대에 이르기까지왕들이 지은 시들을 결집한 "어제시문"을 편집 발간했다.
세조는 이처럼 관제개편을 통하여관리들의 기강확립을, 중앙집권제를 확립, 민생안정책과 유화책인 외교를 통해 민생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편찬과 문화사업으로 사회를 일신시켰다.
그러나 정치운영에는"문치"가 아닌 "강권"으로 운영 인재등용에 실력중심이 아닌 측근중심의 인사로 일관 이로인해 병폐도 심했다.
세조는내용과 관계없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을 가차없이 제거했고 반대로 복종하는 인물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했다.
계유정난 공신이며 변방안정에 공이 큰 양정을 세조의 퇴위를 희망하다 불손관심죄로 참형했고, 공신 홍윤성은 자신의 세력을 믿고 수하로 하여금 살인을 했는데도 순종을 잘한다는 이유로 주의만 주고 끝내기도 했다.
세조는 대간과 의정부의 기능을 완전 축소하고 승정원 중심으로 국사를 운영 승정원과 육조를 모두 심복인 정난공신들에게 맡겼다.
외교통인 신숙주를 예조판서에, 군사통인 한명회를 병조판서에, 재무통인 조석문을 호조판서에 앉히고 동시에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도 겸직하게 했으며 공신들은 현직에서 물러나도 부원군자격으로 조정정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비서실 중심의 철저한 측근정치였다.
세조는 1468년 말년에 와서 체력의 한계를 느끼자 원상제(院相制)를 고안도입하여 왕이 지명한 삼중신(한명희, 신숙주, 구치관)이 승정원에 상주 왕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 처리하라는 일종의 대리서무제를 실시했다.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어 완상제를 도입하고 1468년 9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다음날 죽었다.
세조의 지나친 왕권강화에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중앙집권 왕권이 확립되었으나 그의 상명하달식의 국정운영이 정국경색을 초래하여 공신들의 권력남용으로 비리가 누적되어 갔고 정치문화 측면에서 "문치대화정치"를 멀리하고"강경 강권정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정치발전은 저급한 수준이였다.
세조는 재위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말년에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등 패륜을 범하기도 했다.
현덕왕후가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피부병에 시달렸다는 이야기와 그 병을 고치기 위해 상원사를 찾아왔다가 문수동자에 의해 쾌유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세조는 불교를 융성시킨 왕이기도 해 궐내에 사찰을 두었고 승려를 궁내에 불러들이기도 했으며 그는 왕자시절 불교언해작업에 참여한 경험이 있어 교학에도 밝았다.
그러나 그의 융성책은 유교적 입지가 약한 현실적 선텍이였다는 측면도 있다.
형제를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것도 부족해 결국 죽여버린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산 세조는 1468년 왕위를 물려주고 52세에 세상을 떴다
그는 정희왕후 윤씨를 비릇 2명의 부인에게서 4남1녀를 얻었으며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광릉에 묻혔다.
광릉은 세조가 평소 석실의 유해무익함을 강조해 석실과 병석을 쓰지말라는 유언에 따라 병석을 없애고 석실 대신 회격으로 꾸몄으며 십이지상은 난간 동자석수에 옮겨새겨 쓸데 없는 비용을 절약했으며 능의 배치상 同原異岡의 형식을 취했는데 이는 국초 왕릉제의 일대 개혁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