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줄
첫 줄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써진다면
첫눈처럼 기쁠 것이다.
미래의 열광을 상상 임신한
둥근 침묵으로부터
첫 줄은 태어나리라.
연서의 첫 줄과
선언문의 첫 줄.
그것이 써진다면
첫아이처럼 기쁠 것이다.
그것이 써진다면
죽음의 반만 고심하리라.
나머지 반으로는
어떤 얼음으로도 식힐 수 없는
불의 화환을 엮으리라./심보선
동쪽 하늘에 움터오는 먼동을 본다. 세상에서 가장 장엄한 첫 문장이다. 동시에 전체를 포괄한 문장. 먼동은 이내 내 방의 창문과 집 마당을 서술하고, 들들들들 잘도 돌아가는 재봉틀처럼 이 세계 모두를 거침도 없이 서술해 간다.
먼동, 저것을 어떤 문장으로 옮길 수 있을까? 어디로든 뻗어갈 수 있고 종내 모두를 수렴할 수 있는 문장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고 누구도 보지 못했으리라. 그 '둥근 침묵'으로부터 나의 하루도 시작한다. 누군가가 타고 가던 태양의 궤도를 받아 나는 그 위에 올라선 듯하고 그 위에서 균형을 맞추느라 안간힘을 다한다. 그것이 우리들의 인생이 아닌지. '연애'의 궤도를 돌고, 의미심장한 '선언'의 궤도를 돌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첫 문장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마르크스) 혹은 "세계가 지금보다 5세기가량 젊었을 때, 삶에 일어난 많은 일들은 지금과 현저히 다른 모습과 윤곽을 띠고 있었다."(호이징하)
글 쓰는 이에게 첫 줄은 '먼동'이다. '첫눈을 기다리는 마음'이나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는 마음'이나 다르지 않으리. '불의 화환' 같은 것이리.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