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恩來(주은래)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혁명가, 총리였어며, 사회주의 운동가입니다.
장쑤성 화이안에서 태어났죠. 톈진 난카이 대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교, 파리대학 등에서 유학하였다고 합니다.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의 부인 마사 겔흔은 저우언라이를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바로 저우언라이다.
저우언라이는 우리가 중국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좋은 사람이었다. 중국 공산당원들이 모두 그와 같다면 중국의
미래는 분명히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 라는 평을 했습니다.
그 주은래의 인물됨을 나타내는 몇 가지 일화가 있어 알아봅니다.
닉슨이 중국으로 와서 저우언라이와 같이 탁구 경기를 보는데,
갑자기 자리를 빠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어디 다녀왔는가?” “내일 당신이 만리장성을 가신다고 하니,
그쪽의 눈을 미리 치워놓도록 조치하고 왔습니다.”
이렇게 주밀한 저우언라이가 사망했을 남긴 유산은 겨우
70만원이라고 알려져있습니다.
생전에 마오쩌둥(毛澤東)도 “주은래는 사리사욕이 전혀 없고,
고상하고 순수하며, 도덕적인 사람이고, 또 인민해방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헌신한 사람”이라고 평을 했습니다. 그 중 우리를
감동시키는 일화는 1946년 공산당 중앙위원들이 비행기를 타고
옌안에서 충칭으로 갈 때의 일입니다. 갑자기 기장이 “날개가
결빙이 생겨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모두 낙하산을 매시오!
전부 낙하산을 매었습니다. 그런데 한 소녀가 낙하산이 없는 것입니다.
그 때 주은래는 자신의 낙하산을 벗어 소녀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다행스럽게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주은래의 육무(六無)를 한 번 알아봅니다.
첫째, 사불유회(死不留灰)입니다.
죽어서 유골을 남기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주은래가 사망한 시점은
역사의 격변기였습니다. 임표(林彪) 집단이 막 숙청되고, 강청(江靑)의
사인방(四人幇)이 여전히 세력을 떨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1976년 1월 주은래가 사망하였다는 소식과 슬픈 음악이 라디오에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TV로 간략한 고별의식이 중계되었죠.
이 때 강청은 모자도 벗지 않고 고개를 숙여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었다고 합니다.
며칠 지나서 팔보산(八寶山)에서 화장을 하였습니다. 1월 15일
추도회가 끝난 후, 부인 등영초는 생전에 유골을 남기지 말고
대지에 뿌리라고 하였다는 얘기를 전했습니다. 주은래의 유골을
그가 대학을 다니고 혁명을 시작했던 천진에서 황하입구까지
농업용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뿌렸다고 하네요. 유골이 없으므로,
유골을 묻은 장소나 비석도 당연히 없다고 합니다.
둘째, 생이무후(生而無後)입니다.
살아서 후손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중국인의 습관에는 후손을
잇는 것이 매우 중요하죠. 그리고 누구의 후예라는 것은 생활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집니다.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후손을 두지 않는 것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후손들이
선인을 기리는 것에는 첫째, 고거(故居, 거주하던 집), 둘째, 묘지,
셋째, 후손인데, 그 중에서 후손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은래는 혁명과정에서 희생된 열사들의
자손들을 보살피고(총리를 지낸 이붕은 주은래의 양자이다),
자신은 후손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셋째, 관이무형(官而無型)입니다.
관직에 있었지만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수 천 년 이래로 관직은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고, 관직이 높을수록 특수한 대우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주은래는 외교, 공무를 수행할 때는 관리였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보통의 백성과 똑같이 생활했습니다.
그는 중국유사이래 처음 있는 평민재상이었다고 합니다.
넷째, 당이무사(黨而無私)입니다.
당에 있으면서도 사사로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레닌은 사람은
계급으로 나누어지고, 계급은 정당이 영도하며, 정당은 영수가
주재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있으면 당은 있게 마련이죠.
정당 외에 붕당, 향당 등의 사당이 있는 것입니다. 모택동 주석도
일찍이 당 외에 또 당이 있으며, 당내에도 파벌이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당을 이루고, 이익이 맞는
사람끼리 당을 이루며, 당을 이룬 뒤에는 사익을 취합니다.
그리고 권력을 취하고 영화를 취하는 도구로 쓰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주은래는 당내에 파벌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당을 이용해 개인의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다섯째, 노이불원(勞而不怨)입니다.
고생을 해도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은래는 혁명사업 과
국가건설에 많은 고생을 한 사람 입니다. 그는 해방 전에는
상해노동자궐기투쟁, 대장정, 삼대전역, 지하투쟁 등으로,
해방 후에는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무척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죠. 업무량으로만 계산한다면 주은래의
업무량이 당시 당원들 중에서 가장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 마디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답니다.
여섯째, 사불유언(死不留言)입니다.
죽으면서 유언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1976년 주은래가 죽기 전에
모택동도 매일 한 번씩은 주 총리의 병세를 물어보고, 부인도 매일
병석에서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혁명원로들은 사인방에 의하여
거의 다 타도되고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 엽검영(葉劍英) 원수였습니다.
엽검영은 백지를 비서들에게 주고, 혹시 주은래 총리가 무슨 말씀을
하시면 하나도 빼지 말고 기록해두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사망 후에 다시 받아본 백지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않었다고
하네요. 주은래라고 어찌 남기고 싶은 말이 없었겠습니까?
아마 후일의 분란을 미리 막기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주은래는 중국 인민의 가슴 속에 영원한 총리로 남아 있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