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1.010219 무전숙식
검은 웃옷의 단추가 노랗게, 주르륵 차례로 달려 목 밑까지 올라가서 두 쪽의 나비 날게 같이 마무리된 옷 가운데에 마지막 단추가 또렷이 박혀서 단정해 보인다. 왼 손에는 까만 가죽가방이 들려서 왼쪽 어깨가 조금은 처진 듯이 보인다.
먼 길을 걸어오느라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됨직 하다. 가랑이는 뒤쪽이 하얗게 돌가루 먼지가 묻어서 회색으로 물들어있고 운동화의 끈이 제 짝이 아닌 것이 확연하다. 머리는 귀를 덮어 마치 미친 사람의 머리 같다. 덥수룩한 수염은 아직 앳된 얼굴을 가리기엔 연하고 보드라웠다.
행색이 이 정도면 ‘우리 집의 방이 다 찼으니 어느 쪽으로 가시는지는 모르지만 조금을 더 가서’ 알아보도록 친절하게 안내해서 정중히 거절해야 옳으련만 우리 어머니는 우리 집에 오시는 손님은 그 행색을 가리지 않고 길손의 어려움을 헤아려 조건을 따지지 않으신다. 그가 무일푼일지라도 방이 비어 있으면 들이신다.
수없이 많은 공식과 공잠을 재워 보냈건만 한 번도 원망하기는커녕 가버린 쪽을 향해서 눈 한번 흘기시지 않으신다. 아들을 키우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드러내시는 거다.
머무는 동안 청년은 많이 회복되었다. 이발도 하고 수염도 깎고 신도 빨아 신고 한결 생기를 회복한 그는 외출이 잦아졌다.
외출 때마다 공손하게 어머니께 신고를 하고 나가기는 하는데 따라가 보지 않았으니 가는 곳은 알 수 없다.
반드시 잠깐 나갔다온다는 친절(?)한 설명만을 토로 달아놓고 나가면 그만이다. 이렇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많은 날을 무엇 때문에 나다니는지를 아무도 모른 채 일주일이 지났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조반을 들고 느지막이 나선 그는 역시 방안에 책 뭉치를 몇 권 쌓아놓고 나갔다. 저녁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고 아침이 되어도 종무소식이다. 그는 잠적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돌아 오라라고 굳게 믿는 것이 또 우리 어머니이시다. 피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됐으리라고까지 감싸서 이해하시는 어머니이시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이제는 잊도록 식구들끼리 다짐하면서 그 책 뭉치를 가져다가 살펴보았는데, 잡다한 책은 기억에 없고 단 두 가지만은 또렷이 생각이 난다.
한 권은 일본어로 된 백화점 경영에 관한 책이고 다른 한 권도 역시 일본어로 된, 자동차의 구체적 구조를 공부할 수 있는, 그림을 곁들인 보기에 자세한 설명이 돼있는 것인데 두 권 다 두꺼운 양장본으로 돼 있는 것이 그때 생각으로는 꽤나 비싼 책같이 보였다. 그러나 내 소용에 닿자면 십 년은 더 있어야 할 듯한, 내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돌덩어리 같을 뿐이었다.
왜 이런 것이 다른 것들을 몰아내고 깊숙이 들어박혀서 지워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 즈음 세상을 살아가려면 알아야 할 것이 가뜩이나 많고 외어야할 것이 많은데, 지금 내게 들어갈 틈 없이 차있는 과거의 자잘한 기억들, 이것은 어쩌면 다시 내가 끄집어내서 정리하고 다듬고 닦아서 내가 무엇인가를 얻어야하는 이유 때문에 머릿속에 머물러있다고 가정한다면 나의 몸부림은 이제 시작이 되는 셈이다.
음미해보느니, 어머니의 순박하시고 자애로움이다. 여인숙 간판을 보고 찾아드는 모든 젊은이는 나와 연관 지어서, 나를 상정(想定)하여서 처신하셨다고 여겨지고 그 염력(念力)으로, 그 아린 돌보심에 힘입어, 내가 이날까지 버텨 있을 수 있었나싶다.
그 젊은 아저씨는 어쩌면 먼 길을 떠나가다가 노자가 바닥나서 우리 동네에 머물면서 일자리를 구해 다녔거나, 아니면 흐르는 냇물이 푸른 바다로 흘러드는 용해의 이치를 깨달으려 제방 끝에서 한없는 시간을 며칠씩 보냈는지 모를 일이다.
살아있다면 아마도 그 아저씨는 되갚을 수 없는 인정 어린 어머니 도량에 대해 태산 같은 무게를 짊어지고 오늘을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외통-
어린이의 웃음은 가장 거룩한 날을 한층 더 성스럽게 하리라.(R.G.잉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