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성기擴聲器

외통프리즘 2008. 6. 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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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성기 擴聲器

1558.010101 확성기 擴聲器

그 때는 동네에 라디오를 갖고 있는 집이 몇 집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달 수 있는 만큼 확성기를 달아서 그나마 외부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신문이 있긴 했어도 집집이 따로 볼 형편이 되지 않으니 있으나 마나 한 구문인 것을, 그래도 신주같이 모시고 돌아가는 형편을 어렴풋이 짐작하는. 그런 농촌의 한 때였다.

 

예고한 대로 그 날 낮, 라디오나 확성기 주위에는 애 어른 할 것 없이 방을 채우고  마당을 가득 메웠다.

 

부글부글 끓는 소리와 모래 씹는 소리가 섞여나는 확성기에서 사람의 말소리를 걸러 듣는다는 것은 웬만큼 인내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도 누군가가 제대로 들을 사람이 있으리라는 기대였던지 모인 사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확성기의 소리가 커질 때마다 흔들리면서 치(寸)로 앉은 먼지가 가랑비 오듯이 떨어진다. 이 방에 새끼틀을 들여놓고 겨우내 새끼를기계를 돌리던 방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주인은 이 신기한 소리통을 신주통처럼 모시는데, 건드리면 소리가 나지 않을 까봐 손끝도 대지 못하는, 위엄이 가득한 소리 통으로 여겼다.

 

행진곡은 바다를 건너 대륙을 노략하는 힘찬 곡이었으나 반응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시간이 됐다. 찢어지고 갈라지는 소리를 헤집고 일황(日皇)의 엄숙하면서도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듯 만세를 부르는 이도 없고 울음을 터뜨리는 이도 없다. 서로를 쳐다보며 말이 없다. 소리는 흩어지고 확성기는 여전히 끓는 소리를 낼뿐이다.

 

마을의 분위기는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며 술렁이기 시작한다. 기정사실로써 받아들이는 것이다.

 

확성기로 해서 세상이 바뀌는, 이런 엄청난 일을 경험하는 나는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무슨 뜻이 있는지 알아내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왜 세상을 뒤흔드는지를 알기에 앞서 그 확성기의 위력을 실감하는 나의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아침마다 하던 라디오체조의 소리는 낭랑하더니만 항복의 소리는 왜 찢어지고 잠기는 소리였나. 이 소리에 포연이 멈추고 이 소리에 희열의 축포가 불붙었고 이 소리에 패배의 슬픔과 억울함이 할복으로 이어졌다.

 

확성기는 변혁의 선봉에서 일했다. 진군의 나팔소리를 크게 울려서 온 백성을 움직였고 선무(宣撫)의 임무를 수행하려 주둥이를 넓혔다. 그러나 확성기는 모든 행동을 정지시키는 위력도 또한 발휘했다.

 

 

옛 확성기를 생각하면서 잠시 생각한다. 확성기소리가 요란하면 할수록 질서의 붕괴 요소는 짙어가며 결국 변혁의 새바람이 불어온다는 생각이다.

 

 

육이오 전엔 남과 북이 불어 댄 나발소리가 커지더니 동란이 발발됐고, 자유당시절에는 소리 큰 쪽이 상대를 제압했고 나발을 많이 달수록 득을 보는 것 같이 시끄러웠지만 정권의 붕괴를 가져왔다.

 

사일구이후 거리의 스피커가 요란하더니 또 질서는 흔들리고, 새마을 과 유신의 나발이 드세지더니 침몰했다.

 

확성(擴聲)은 내부적 힘의 표출이 아니라 내부의 모순과 갈등을 토하는 숨은 탄식에 지나지 않는다.

 

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시대는 지났다. 확성기 속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가 무언의 솜뭉치엔 아무 메아리가 없듯이 우리는 솜과 같은 부드러운 지혜로 고성능의 확성기가 뿜는 소리를 흡수 할 수 있어야한다. 그리고 확성기의 음이 커질수록 그 소리에 울려서 질서의 균열은 커가는 이치도 깨닫는다.

 

오늘에 와서. /외통-

야망이 끝나는 바로 그곳에서 평화는 시작된다.(E.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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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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