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3.000920 할아버지
러시아 전역을 훑으면 어느 곳에선가 ‘무슨무슨쵸프 서’ 라고 하는 이름의 할아버지 후예들이 튀어나와 반길 것 같은 막연한 기대와 잔잔한 흥분의 물결조차 일어나는, 역시 할아버지의 후예인 내가 갖는 평소의 심경이다.
사랑방 할아버지들의 모습이나 세상을 뜬 이의 영구행렬을 보며 자란 나는 안 계시는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늘 가시지 않았다. 살았던 흔적이나마 찾고 싶은 마음이 지금도 꽉 차 있다. 그런데도 실현시킬 수 없는 무기력을 한탄한다.
내가 자랄 때에 할머니를 보며 느낀 점, 홀로 게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쓸쓸해 보였지만 그런 것이 나에겐 별 일이 아닌 것처럼, 이웃의 다른 집 할머니들처럼 그렇게 평범한 할머니로만 여기고 싶었다. 굳이 어른들의 일에 참여하려 들지 못했으니 비록 생각에 그치는 일일지라도 지금은 지극히 송구할 뿐더러 뒤늦게 뉘우친다.
이 지구상의 모든 현존인과 이미 세상을 뜬 모든 저승 가신 이를 모아 놓고, 부르고 뒤지고 살펴서 할아버지의 행적을 알고 그 후예들을 찾아내서 우리가 태어난 뜻을 알고 새겨 보고 싶을 따름이다.
어떤 연유로 고국을 떠나서 유랑 길로 들었으며 백러시아계의 여인과 인연을 맺었는지 나는 모른다. 지금은 할머니가 청상과부로서 평생을 수절하시며 살아오신 명백한 사실, 할아버지가 백계 러시아인인 새 할머니를 맞아서 후손을 두었다한들 그것은 명백한 사실로만 있을 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 결과인데 무슨 사연이 있었든 무슨 상관이랴 싶다. 그러니 못난 이 후손은 청운의 꿈을 안고 북만주 연해주 벌판을 누비며 전전하시다 러시아에 뿌리를 내린 할아버지의 후손이 러시아에 있으므로 해서 더욱 할아버지의 가신 길을 추앙(推仰)할밖에 없다.
할아버지께서는 무한한 희망이며 대단한 존재임에 틀림없는, 즉 이 세상에 태어난 참뜻을 이룩하신 분으로 자랑하고 싶다. 한 여인의 일생을 담보로 먼 시베리아까지 씨앗을 뿌렸다면 가히 우리 할머니의 희생은 값지다 할 것이다. 할아버지의 행적을 믿고 싶다. 반듯하고 웅대했으리라. 다만 시간이 그 뜻을 펴기에 너무나 짧았을 것이다. 그랬으리라.
경의선 철도가 이어진단다. 그러면 제일먼저 할머니께 고하고 북만주로 달려가서 할아버지의 체취를 느껴보고 내친김에 시베리아로 들어가서 할아버지가 밟았던 그 길을 가보고 싶다.
그래서 어딘가에 묻혀계실 할아버지의 유해를 찾아뵙고 그 갈래를 찾아 엮어서 한 울을 만들고 싶건만 언제나 되려는지, 다음 세대로 이 엄청난 일을 또 물려주어야 할 것인지 아득하다. /외통-
만일 사람들이 미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들은 곧 현재를 슬퍼해야 할 것이다.(W.G.베넘)